2022. 10. 27. 22:32ㆍ이야기/그래 그 영화

생각과 달랐다. 그저 그렇고 그런 얘기일 줄 알았다.
목탄을 드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병세가 깊은 유명 조각가와 아이 없는 조각가의 아내, 가난하고 순진한 누드모델과 날마다 그녀를 폭행하는 누드모델의 남편. 줄거리만 보면 딱, 돈 좀 있는 부잣집에서 펼쳐지는 '욕정의 거사'였다.
부끄러웠다. 왜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이 영화에 접근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세상은 더럽고, 추하고, 차갑고, 냉정한 곳이라고 단정 지으며 살지 않았는지 성찰이 필요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도 다소 선입견의 원인을 제공했다. 1960년대는 가난이 일상이었고, 하얀 쌀밥과 고깃국이 흠모의 대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부자에 대한 질투와 욕망이 더욱 처절하고 직선적으로 표출되곤 했었다.
영화 <봄>은 정곡을 찔렀다. 종내 그 선을 넘지 않고 순결하게 끝났다. 이처럼 순수하고 흥미롭게 사랑 이야기를 전개하는 영화는 처음 봤다. 신파 같았지만, 도저히 넘겨짚을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서 흘렀다. 대문대문이 서정시 같았다.
<봄>에는 갖가지 사랑의 형태가 등장했다. 욕망, 순정, 의지, 믿음 등 두 부부의 삶으로 다양한 삶과 사랑의 모습을 투사했다. 그 중에서 이 영화는 진정한 사랑의 가치로 두 단어를 전면에 내세웠다.
엄숙하게 짓누르는 사랑의 정체는 인내와 공경이었다. 오직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다림과 포용력, 상대방의 행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깊은 자혜로 숨 막히는 현실을 누그러뜨리며 무한한 평화를 찾았다. 개그콘서트 코너 '끝사랑'에서 태진아의 노래 '동반자'에 맞춰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과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사랑이었다.
혹자는 이 영화의 주제를 '진정한 예술의 가치나 아름다움의 의미를 발견하는 조각가의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영화의 제목 '봄'이 주는 강렬한 의미 때문이다. 아니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모티브는 조각가 부부의 순도 높은 진심, 흉내 낼 수 없는 참을성이 보여준 사랑이다.
배우들의 내면 연기는 깊은 몰입을 선사했다. 표정 하나하나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행복과 처절한 상처, 가슴을 내려치는 슬픔이 배어났다. 말없이 서로 상대방의 심중을 헤아리는 박용우와 김서형의 연기는 원숙미 그 자체였고, 몸을 사리지 않은 이유영의 열연은 한껏 영화의 기품을 높였다.
특히 애조가 배어 있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었다. 병자처럼 핼쑥한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각가 부부의 눈물과 미소는 삶과 사랑의 고통 그 자체로 다가왔다.
영화 <봄>은 삶을 고요하게 내려놓게 한다. 마음속에서 '죽는 날까지 아름답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펌프질하게 만든다. 아울러 조각가 아내가 보여준 삶은 사랑의 주체성을 각인시켰으며, 그토록 집중하고, 애절하고, 고독했던 조각가의 결단도 보기 힘든 삶이다.
사람은 누구나 빈틈과 허식에서 빠져나기기 위해 애쓴다. 교만과 경건, 부유와 가난에서 줄타기하며 삶을 저울질만 하지, 그것을 내면의 진실과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사랑에 신중하는 이유도 수치심과 돈벌이를 걱정하는 욕망이지, 사랑의 거짓됨을 묻는 것이 아니다.
눈길을 돌려야 한다. 이 세상이 '똑똑하다'고 말하는 것에서 잠시 떨어져 자신의 삶을 훑어볼 일이다.
영화 <봄>은 제23회 아리조나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외국영화상을, 밀라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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