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극작이다. 한숨부터 새어 나온다. 연극 <수탉들의 싸움>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니다. 그럼 주인공에게 자신 중 한 사람을 선택하고 강요했던 두 사람은 과연 그를 사랑했을까? 그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주인공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만 집착했다. 자신의 기분과 감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그를 닦달했다. 강자가 약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확인받기 위해 혼내고 윽박지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인간의 가장 강렬한 기질 중의 하나는 인정 받고, 사랑 받고, 존경 받으려는 욕망이다.
연극 <수탉들의 싸움>의 주인공 존은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남자는 오랫동안 함께 동거한 동성애인, 또 한 사람은 우연히 만나 두세 번 정도 성희를 즐긴 여성이다.
객관적인 상황은 이렇다. 존은 자신을 무시하는 동성애인보다 자신을 존중해 주는 여성이 좋다. 또 자신이 동성애자인줄 알았지만, 처음 알게된 여성과의 잠자리를 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존은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신이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얘기하지 못한다.
극작가 마이크 바틀렛이 주목한 점은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존의 태도로 보인다. 존의 뜨뜨미적지근한 태도로 말미암아 치열한 말싸움은 전개되고, 두 사람은 집요하게 존의 선택을 강요한다. 아량이냐 배려는 없다. 계속해서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서 존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구석으로 내몰아 세운다.
본질은 다르다. 실제 이 갈등의 근원은 존이 두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점이다. 현실에서는 전혀 사랑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케릭터 존을, 연극에서는 두 사람이 그의 선택을 받기 위해 죽기살기로 매달려 싸운다. 왜일까.
작가는 이 작품을 수탉들이 싸움판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썼단다. 인간이 붙인 싸움에, 수탉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적을 죽이는 것이 전부인냥 죽기 살기로 싸운다. 존을 사랑하는 두 사람도 그렇다. 존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면 마치 자신의 존재를 상실하거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싸운다.
소유욕이다. 존을 무시하고 짓누르는 두 사람의 욕망이 싸움을 불렀다. 두사람이 진정 존을 사랑했다면 달랐다. 두 사람은 존의 양심을 믿고 기다려주면 됐다. 욕망과 성은 인간 행동에서 중요한 동기다. 하지만 그것을 조절하는 이유는 양심의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소유욕을 애정으로 착각하고 산다. 푸른 초원에 말을 놓아 길러야 잘 자라듯, 넓은 마음으로 초연하게 상대를 대하면 없던 애정도 들어찬다. 그래도 떠나겠다면 인연이 아니다. 애욕과 질투로 사랑과 사람이 얻어지면 뭐가 걱정인가.
이 작품은 꽤 감각적인 대사들이 오간다. 말장난을 좋아하는 사람, 갈등을 즐기는 관객이라면 <수탉들의 싸움>에 만족하겠다. 네 사람의 대화는 바보들의 수다처럼 정말로 한심하다. 그래서 웃음이 피식나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것이 이 연극의 장점이자 매력이다.
무대는 투계가 벌어지는 경기장처럼 육각형이다. 이 무대를 중심으로 사방에서 관객이 앉아 구경하는 구조다. 무대미술은 이것이 다다. 여기에 싸움을 알리는 종소리와 음악, 배우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통로는 두 개다. 배우가 초장에 객석을 틀어쥐지 못하면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다. 게다가 건너편 관객의 얼굴이 자꾸 보여 신경 쓰인다. 송정안 연출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프레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프레임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를 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건너편 사람과 자주 눈길이 마주치고, 그 와중에 무대에서 배우들은 시종일관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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