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고 창피하다. 가슴이 와들와들 떨린다. 우습게도 울고도 싶어졌다. 다큐 <논픽션 다이어리> 때문만은 아니다. 그 당시보다 나아지지 않은 현실, 아니 더욱더 나빠진 우리 사회가 보여서다. 이 다큐는 1990년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을 가감 없이 그대로 투영해낸다. 그리고 그 자화상을 현실로 급하게 소환한다. 부자와 빈자의 분화를 촉매하고, 인간보다 물질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를 예의 주시하자는 일종의 ‘경고’겠다.
세간의 감탄사와 다르게, 다큐 <논픽션 다이어리>는 충격적이지 않았다. 그 당시 젊은 시절을 보낸 연배라면 비슷하겠다. 3당 합당과 분신정국 투쟁을 지나 문민정부와 오렌지족 등장,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를 지켜봤던 청춘에게 지존파 사건은 끔찍했지만 우리 사회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기에 충분했다.
1990년 노태우, 김종필, 김영삼이 ‘3당 합당’에 참여해 민자당이 탄생했고, 김영삼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의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 당시 우리 사회에는 퇴폐적인 소비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생겨날 정도로 자본주의의 부작용이 발현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정치권은 부패와 붕당정치가 만연했고, 지역 패권주의가 극에 달했다.
결국 1994년 한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지존파 사건이다. 지존파는 사람을 납치하고 죽이는 것도 모자라 시신을 절단하고 소각하는 등 상상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이들은 크게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꼭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이지 못해 안타깝다”며 압구정 오렌지족, 부자들을 향한 분노와 살의로 내보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지존파 사건에 대처하지 않았다. 언론은 이들에게 악마의 자손, 사악한 영혼이라는 수식어를 덧씌우기에 바빴다. 이런 양상은 종교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예 이들을 외면해버리거나, 반대로 과민하게 이들의 교화에 나섰다. 또 정치권은 지존파 사건을 이용해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세력을 잡아 가두거나, 겁을 주기 위한 본보기로 사형을 집행해 나갔다. (문민정부 때 김영삼을 보좌했던 한완상 부총리는 이 다큐에서 김영삼 정권의 개혁이 좌초된 이유와 극형으로 사회를 다스리려 했던 문민정부의 과를 밝힌다.)
여기에서 끝나면 다큐가 싱겁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곧바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를 지존파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지존파는 10억을 모으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다는 진술도 한다. 상품백화점 사장도 지존파와 같이 돈을 모으려 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건물이 붕괴될지 모른다는 경고까지 무시했다. 성수대교도 마찬가지였다. 상판과 상판 사이가 이미 벌어진 상태였지만 어느 누구도 운행을 막지 않았다.
성수대교 붕괴사건으로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으로 502명이 죽고 937명 부상, 6명이 실종됐다. 지존파는 5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똑같이 사람을 죽였지만 지존파는 다음 해 이례적으로 빠른 사형을 받았다. 그러나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의 책임자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현재도 유효하다. 이후 2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인재로 목숨을 잃었지만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 광주항쟁 때 수많은 시민을 죽인 전두환과 노태우도 여전히 살아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거대한 배가 침몰해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바다에 수몰돼 목숨을 잃었지만 박근혜 정부는 책임전가 하기에 바빴다.
과연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인 지존파만 악마의 씨일까. 권력과 돈을 위해 내달리는 모든 이들 또한 악마의 씨를 품고 있지 않을까. 이 다큐는 지존파에 강한 애착을 가진 정형복 서울 구치소 교도관의 목소리를 빌어 말한다. 정 교도관은 처음 지존파의 범죄에 강한 분노를 느끼지만 수십 명의 사형집행을 참여하면서 사형제도의 모순을 지적한다. “절대 악인도 절대 선인도 없다. 우리 마음속엔 악마와 천사가 공존한다.”
정윤석 감독은 김형태 인권변호사의 얘기로 다큐를 정리한다. 김 변호사는 인혁당 사건의 국가 배상을 이끌어낸 변호사다. 그는 “관리 태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IMF로 무너진 가정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죽음의 수는 어마어마하다”면서 “지존파의 살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회적 악이 훨씬 크다”고 말한다. 이어 사형제를 둘러싼 김영삼 정권의 정치적 의도까지 들려주면서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법이 작동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큐 <논픽션 다이어리>는 한국 관객에게는 슬픔과 공분을 일으킬 다큐다. 그 당시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 혀를 찰 것이고, 지존파에게는 옅은 연민도 일 것이며, 과도한 자본주의의 종말이 무엇인지 예측하게도 만들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이 보는 이 다큐는 매우 다를 것이다. 우선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에 깜짝 놀라 자빠지고 말 것이다.
지존파의 납치 모의와 살인, 이후 검거까지의 행적은 고병천 전 서초경찰서 강력반장과 오후근 전 서초경찰서 강력반 형사의 인터뷰로 실감 나게 그려진다. 두 사람은 지존파 사건뿐만 아니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로, 두 사건의 본질을 비롯해 사형과 업무상 과실의 아이러니함을 역설한다.
지존파 두목 김기환이 사형을 선고받은 뒤 “전두환, 노태우는 무죄인데 왜 나만 유죄냐”고 소리를 치는 장면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린다. 과연 국가가 법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옳은 건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에서 개인의 죄와 국가의 죄는 누가 결정할 수 있는지,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대형 재해를 막지 못하는 국가 시스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사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없는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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