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뒤통수를 간질이는 계절이 왔다. 이 계절에는 어딜 가나 별천지요, 선경이다. 호들갑스러운 마음만 다스리고 떠난다면 장소는 그다음 문제다. 피곤하고 잡다한 일을 해치우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책무라고 해도, 가끔씩은 충전이 필요하다. 많은 돈 들이지 않고 서울 근교에서 평화로운 휴식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지를 소개한다. 바로 천년고찰 ‘흥국사’다. 서울 인근에 이렇게 오래된 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비롭다.
흥국사는 661년 신라시대 문무왕 원년에 세워졌다. 당대 최고의 고승인 원효 스님이 북한산 원효암에서 수행하던 중 북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들이 배출된다’는 이름의 흥성암을 창건했다. 이후 1686년 조선 숙종 12년에 중창하고, 영조시대에 크게 발전해 ‘흥국사’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흥국사는 북한산 초입에서 가깝다. 구파발에서 버스를 타고 북한산국립공원 한 정거장 전에 내리면 건너편에 바로 흥국사로 올라가는 푯말이 나온다. 흥국사로 올라가는 길은 단조롭다.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과 고목 숲을 지나면 일주문이 나온다.
흥국사로 올라가는 길, 나뭇잎 사이로 태양이 보였다. 붉고 조용하게 타오르는 태양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찬란한 태양과 초록의 빛깔을 늘어뜨린 계절. 눈부신 계절의 향연을 부추기는 태양은 다채로운 흥분이자 심장을 소리 없이 갈라놓는 환희를 선사한다.
빛나는 태양은 언제나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이날도 마찬가지다. 각박한 도시생활에서도 여전히 태양을 즐길만한 여유를 잃지 않아 다행이다, 아니 돈 들지 않은 태양을 맘껏 사치할 수 있어 너무도 방자하다. 작은 기쁨으로 삶을 만족하고 분배하다 보면 일상은 무작정 피로한 것이 아니라 강한 생기를 북돋아 주는 힘이 된다.
흥국사 경내는 거울처럼 조용했다.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생명의 움직임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평일, 천년고찰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겠다.
지루하고 밋밋한 풍경을 단숨에 물리친 건 거대한 종과 탱화였다. 또 세월의 무게가 켜켜이 쌓인 사찰과 단청이었다. 특히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온 나무와 바랜 아교물감이 꽤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 곱던 청춘의 얼굴도 세월의 무게는 감당 못한다.
경내에는 ‘세월호희생자극락왕생발원’이라는 연등도 걸려 있어 한결 마음을 무겁게 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다시 곱씹었다. 불평, 불만, 나만 고생하며 산다는 어리석음을 물리치고, 가만히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평온한 마음으로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유롭지 않은 게 없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가장 무미건조하고 고독해 보이는 것에서도 그 속에는 생명과 매력이 담겨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행복을 잊고 살아왔나. 무채색 도시에서도 이와 같은 즐거움은 맛볼 수 있었겠지만 그저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과 기회를 헛되이 낭비해 왔다는 것이 무척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우리가 잠깐 기웃거리는 순간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단 한 번밖에 없는 시간이다.
한없이 불어오는 따사로운 바람을 맞으며 경내를 쭉 둘러봤다. 두어 시간이면 차 한 잔 마시면서 마음을 내려놓기 충분하다. 좀 더 바람을 더 쐬고 싶다면 계곡을 따라 걸으면 좋겠다. 북한산 국립공원이 멀지 않다.
흥국사에는 거니는 곳마다 문화제다. 흥국사의 본전 약사전은 경기문화재다. 본전 안 석조 약사여래부처는 창건 당시 원효대사가 모신 부처이며, 이곳 상단탱화는 1792년에 그려졌다. 또 흥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탱화 ‘극락 구품도’도 문화재다. ‘극락 구품도’는 김홍도의 작품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중생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부처인 아미타 여래좌상, 야외에 행사를 치를 때 괘도처럼 만들어 걸어두는 의식용 불화인 ‘괘불’, 칠성각에 있는 나한전도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흥국사는 서울 시민들에게 꽤 알려진 절이다. 불교대학과 템플스테이 때문이다. 불교대학은 불교의 지혜를 가르치는 전문교육을 실시하며, 템플스테이는 새벽예불에서 저녁 공양에 이르기까지 스님의 수행생활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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