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린>은 정조의 모질고 모진 운명의 24시간을 그린다.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세 편으로 갈릴 듯싶다. 현빈이냐, 진지함이냐, 오락이냐. 현빈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무조건 ‘오케이’고, 진지한 역사물을 선호한다면 ‘괜찮은’데, 적절한 유머와 자극을 기대했다면 ‘별로’라고 고개를 가로젓겠다.
영화 내용은 양쪽으로 갈려 사생결단이다. 이 영화의 표제어도 ‘살아야 하는 자’, ‘죽여야 하는 자’다. 거기에 하나를 더 붙여 ‘살려야 하는 자’도 넣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이고,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는 중립도, 알쏭달쏭한 사실도 없다.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누구 편에 서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정조를 암살하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죽여라”와 “죽이면 안 된다”가 엇갈린다.
이 영화에 군신의 도리는 없다. 권력의 속성이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편이 갈리고, 오직 힘에 의해 진실은 결정된다. 겉으로는 유유자적하게 시간이 흐르는 것 같지만 왕위를 둘러싼 공방은 뽀드득뽀드득 이가 갈릴 정도로 끔찍하다. 아무리 궁에서 벌어지는 일이라지만 눈이 쌈빡쌈빡해지고, 인간에 대한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
이 영화는 무심하다. 남녀 간의 그 흔한 포옹조차 준비하지 않았다. 웃음을 흘리는 나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조차 스스로 허락하지 못했던 정조였다. 대신 눈요기할 장면을 꼽으라면 첫 부분에 나오는 현빈의 근육질 몸매다. 남자도 시선이 빼앗길 만한 가빠와 등판에 콧등이 시큰해진다. 천박하게 볼지 모르겠지만 이 장면은 굉장히 인상 깊다.
달걀처럼 울겅불겅 불거진 근육 때문이 아니다. 정조의 근육은 볼거리로 끝나지 않는다. 근육은 그 당시 정조의 사투가 어느 정도였는지 암시하는 기제다. 정조는 임금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기계처럼 스스로 몸을 단련했고, 수많은 암살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다. 광목천으로 흙주머니를 만들어 몸에 차고 다니면서 수시로 근지구력을 키워야 했다. 정조와 내시 상책의 오가는 말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보면, 순간 마음이 찡해진다.
특히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환영에 잠식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정조의 모습은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다. 감정이입 제대로다. 무작정 연민이 간다. 그런 경험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트라우마다.
현빈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사람은 흥분을 하면 안면 근육이 씰룩댄다. 하지만 정조는 인간 그 이상의 인내심을 보여준다. 정조가 홀로 눈물을 흘린 장면은 딱 한 번. 섬세하지만 굳건한 왕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현빈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게다가 현빈은 머리도 좋은 것 같다. 엄청 헛갈리는 대사를 머뭇거림 없이 소화한다. 정조는 어명에 번번이 토를 다는 신하들 앞에서 중용 23장을 읊는다.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으로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 23장은 인간이 가져야 할 자세, 핵심은 ‘정성’이다. 정성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우리는 정성을 다해 살고 있는가’, ‘발톱 밑에 끼어 있는 때만큼이라도 따라가려고 노력하는가’ 스스로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중용 23장을 읽고 서얼과 천민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자고 한다. 하지만 신하들은 “아니되옵니다”를 외친다. 정조가 자신이 이뤄야 할 세상을 암시하는 이 장면을 신하들은 부리나케 거부한다.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자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신하들이 겹치는 건 우연이 아니리라.
이 영화는 여태까지 현빈이 그렇게 괜찮은 배우인 줄 몰랐던 무지를 깨우쳐준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조재현과 정재형, 조정석도 발군의 연기실력을 선보인다. 한지민, 김성렬, 박성웅, 정은채 역시 영화의 꽃은 배우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 영화는 총체적으로 보면 쟁쟁한 연기자들의 수준 높은 연기로 격을 높였다.
물론 이재규 감독도 잘 만들었다. 드라마 PD가 영화를 만든다고 ‘꼬장’ 부리던 누리꾼들의 비꼼도 좀 잠잠해질 것 같다. 이 감독은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 <더킹 투하츠> 등 드라마 히트작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험 잡을 데가 없다는 것이 험이다. 영상미도 그 정도면 다른 영화에 뒤지지 않고, 음악도 귀에 잘 감겼다. 촬영, 조명, 의상, 분장, 무술, 미술 등도 뛰어나다. 시간이 되면 그냥, 보라고 권하고 싶다. 현재 관객 점유율 38.8%, 부동의 박스오피스 1위다. 많은 사람이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행여 현빈이라 해도.
이 영화는 1777년 7월 28일, 숨 막히는 24시간을 그린다. ‘정유역변’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졌지만 상책과 살수, 광백, 월혜 등 허구적 인물을 더해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완성했다.
‘정유역변’은 정조가 자신의 침전에 자객이 침투하자 이 사건과 연루된 사람들을 찾아내 모두 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자객이 왕의 침전 깊숙이까지 숨어들었다는 점에서 조선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암살 사건으로 전해진다.
역린(逆鱗)은 임금의 노여움을 이르는 말로, 용의 턱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하여 건드린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다. <한비자>의 세난편(說難編)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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