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미술과 인물

김길후 '최후의 수장고 프로젝트'전 - 구도의 붓질

이동권 2022. 10. 13. 23:39

전시 작품


검다. 어둡고 짙다. 암울한 기운이 뻗쳤다. 불분명한 정체가 두꺼운 두려움을 끼얹어 놓았다. 시커멓게 말라붙고, 얼룩진 얼굴. 그 얼굴과 마주하자 자꾸 마음이 움질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밝은 색채가 덩이덩이 드러나 검은 얼굴에 광채가 돌았다. 완전한 혼돈이었다.

희미하게 뜨거나 감긴 눈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그 눈빛은 전시장 밖으로 여기저기 튀어 맺히며 그을음을 앉게 했다. 갑자기 두 눈에서 불이 번뜩번뜩 켜졌다. 원효가 마신 해골바가지의 물이 떠올랐다. 마음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지는 법이다. 원효는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파계했다. 민중에게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그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승복을 벗었다.  

어둠을 보지 말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다시 주위를 눈여겨 둘러보았다. 자세히 보니 얼굴은 검지 않았다. 주위만 온통 어두울 뿐이었다. 얼핏 보이는 얼굴은 희미한 빛을 받아 드러나는 형체, 깨달음을 채워가는 현자의 모습이었다. 울컥울컥, 꾸역꾸역, 검은 정체를 더 깊게 벗겨나갔다. 그럴수록 혹독한 성찰의 시간이 겹겹이 쌓였다. 

그림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본다. 저 멀리서 앙상하게 서 있는 ‘나’와 마주선다. 검은 기운이 미끄러지듯 사라지면서 목덜미에 땀이 흐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나.’ 그리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행의 시간이다. 

전시장 분위기는 무거웠다. 검은색의 물감과 물감의 두께가 주는 분위기에 압도됐다. 세상의 모든 불안과 근심, 파괴적인 것들이 이곳에 모인 것 같은 느낌. 초조하고 심란했다.  

캔버스는 찐득찐득하고 검은 피가 흐르다 굳은 것 같았다. 표면이 불규칙적으로 울퉁불퉁하지만 호두알처럼 반지라웠다. 게다가 캔버스는 칼과 그라인더, 스크레이퍼, 못처럼 날카로운 물체에 긁혀져 물감의 두께가 그대로 드러났다. 사람의 몸에 난 상처를 보는 것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검게 내비치는 마음속 상처를 억센 힘으로 꽁꽁 동이는 것 같아, 마음이 고요하고 엄숙해졌다. 또 섬세하고 부드러운 화가의 손길도 느껴졌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김길후 작품은 구도의 붓질로 완성된다. 오랜 명상 끝에 한 작품은 탄생된다. 김 작가는 오랜 시간 동안 수행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을 그림으로 형상화한다. 마음과 몸을 정리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지우고 덧칠하기를 반복한다. 그리는 동안 중첩된 물감 층은 그에겐 수행의 결과물과 같다.  

김길후 작가는 검은색을 주재료로 사용한다. 과거에도 검은색을 주색으로 <검은 눈물 Black Tears>, <비밀의 화원 Secret Garden>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다.

김 작가의 검은색은 감각적이다. 검은색은 칙칙하고 침울한 느낌을 준다. 세상사로 비유하면 험악하고 감정의 골이 심하게 패인 현실과 비유된다. 그의 작품도 드문드문 검은 무더기가 뭉치고 흩어지길 반복하면서 황량한 현실 세계를 비춰낸다. 하지만 그의 검은색은 매우 옅은 빛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늘에 떠 있는 아주 작은 별빛에도 예리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은 검은 재가 물속에 가라앉은 모습처럼 은은하다. 마치 예지를 깨달은 사람처럼 진중하고, 어둑한 세상을 비추는 달처럼 묵묵하다.

어둠은 점점 빛으로 사라지고, 거기에서 한 인간이 오롯이 깨어난다. 온갖 수행의 과정을 이겨낸 현자의 모습이다.

 

전시장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