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한복을 입은 여성이 스마트폰으로 바깥 세계와 소통한다. 이 욕구의 뿌리에는 ‘인간다움’이 있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에 대한 근원적 고독이 물씬 묻어난다. 진정한 ‘인간다움’을 사회로 치환해보면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치유하면서 사는 것. 그 테두리의 넓이에 따라 인간다움은 깊어지고, 그 테두리 안에서 인간은 동질감을 느끼고 유연해진다.
이동연 작가의 작품은 선이 힘차고 양감이 풍부하다. 거침없이 미끈하고 아름다워 기품이 넘친다. 그 기품을 더욱 살려주는 건 관람객과 주고받는 방식의 가벼움이다. ‘소통’이라는 주제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독창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인간의 욕구를 경쾌하게 풀어낸다. 그의 작품은 색채도 유려하다. 미묘한 차이가 돋보이는 음영, 옷의 겹침과 피부를 과하지 않게 유추해내고 그것을 화폭에 옮긴다. 그것은 색채의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현하는 작가의 붓심에서 비롯된다.
이동연 작가의 작품은 ‘미인도’다. 언뜻 보면 조선 후기 신윤복의 ‘미인도’가 연상되지만 작품 속 미인은 결코 경국지색이 아니다. 콧날이 서고, 뺨에 살이 알맞게 차고, 입술이 앵두처럼 붉은 여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서화 속에 등장하는 여인처럼 고답적이지도, 화냥기 넘치는 교태도 부리지 않는다. 삼화장 저고리와 폭이 넓은 치마는 그저 미인의 욕망을 품은 현대여성, 평범한 여성성을 강조하고 대변한다.
이 작가는 그림에 동일인을 계속해서 등장시켜 친숙함과 익숙함을 유도한다. 더욱 더 그림에 집중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다. 화가 세잔의 다양한 사과 정물화를 보는 경이로움과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미인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그림 속 여인이 말을 거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을 보는 사람의 시선이 작품 안에서 재생되고, 작품을 보는 자신도 누군가의 시선 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림 속 ‘소통’의 욕구가 현실에서 이뤄지는 혼동에 빠진다. 진성 초상화의 전형이다.
동양에서는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중시했던 가치가 ‘전신사조’였다. 인물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과 표정 등 미묘한 감정선까지 그림에 담아내면서 인물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이 작가의 미인도는 ‘전신사조’에 충실하다. 전형적이고 영구적인 미인도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다. 여인의 감정이 느껴지도록 오감의 감각을 오롯이 담아냈다. 또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옷고름, 속살을 드러낸 실루엣, 풍성하게 부풀려진 속치마를 세세하게 묘사해 실재 그대로의 자연미를 더한다.
하지만 미인은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허리춤에 노트북을 차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전화를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인터넷을 둘러본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범상한 모습을 통해 여성의 소외와 결핍, 고독과 상실이 부른 소통의 욕구를 표출하고, 홀로 출구를 찾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모습은 오히려 편하지 않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려는 것처럼 불안해 보인다. 스스로 엄마로서, 작가로서, 아내로서 살아가는 작가 자신의 반추요, 오랫동안 일상에 묻혀 감춰진 도원경의 염원이다.
그의 미인도는 우연히 나온 그림이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한 형편 때문에 돈을 벌어야 했던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웠단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여성으로서의 삶을 고민했고, 그러한 그리움과 고민이 중첩돼 오늘날 미인도는 탄생했다. 따라서 이 여성은 그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이 시대의 모든 여성이자 동시에 작가 자신일 수도 있다.
이동연 작가는 소유와 상실, 소통과 공감, 사회와 인간, 자본과 휴머니티 등을 동시에 불러낸다. 독립돼 있지만 서로 소통하면서 살아가길 바라는 욕구와 그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여성으로서의 아픔을 미인도라는 역설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 욕구와 아픔의 내면에는 씁쓸한 자조는 없다. 충분하지 않지만 사는데 낙을 찾고, 명랑하게 활동한다. 그래서 여인은 미인이고, 그의 그림은 미인도다. 잘 먹고, 잘 입고, 권세를 부리며 호강만 하는 것이 행복의 유일한 목적이 아닌 것이다.
미술은 단지 예술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물질화된 대상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사회구조의 짜임과 흐름에서 보다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메시징을 보내고, 미술의 이상향은 어떤 방식으로든 휴머니즘의 실현에 있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예술적 생애를 통해 이것을 실천해가는 행위자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소통과 나눔의 즐거움을 아는 예술가 같다. 이해와 변용의 미덕, 소통과 중용의 ‘인간다움’을 아는 중견작가로서, 자신의 작품과 관객의 만남 속에서 커다란 기쁨을 느끼고,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미술 행위에서 숨 막히는 감동을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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