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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제국의 부활 - 갑빠보다 완벽한 예술작품, 노암 머로 감독 2014년작

이동권 2022. 10. 13. 21:11

300: 제국의 부활(300: Rise of an Empire), 노암 머로(Noam Murro) 감독 2014년작


흥미로웠다. 숨죽여 보며 놀랐다. 눈요기가 되는 남자들의 몸도, 머리와 몸뚱이가 동강 나는 칼싸움도, 사고의 폭을 팽창시키는 특수효과도, 사내구실을 못해 안달 내는 욕정도, 신전만큼이나 드높은 남자들의 의기도 아니다. 영화 <300: 제국의 부활>의 가장 큰 감동은 바로 예술작품이다. 스토리에 집중한 나머지 놓치는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눈을 감동시키는 예술이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된 고대 그리스는 미술과 건축의 전성기였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가장 큰 이유다. 

몸. 좋았다. 사람의 몸인가 싶다. 얼마나 단련했는지 울퉁불퉁 반지랍다. 탄력 넘치는 힘줄, 살갗에서는 기름기도 뚝뚝 떨어진다. 저 정도라면 몇 날 며칠을 싸워도 힘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다. 죽음 이외에 피로도 없다. 고통도 없다. 붕대로 쓱 감아버리면 또다시 전사가 된다. 철인이다. 그래도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다. 영화를 보다 말고 자연스럽게 팔짱이 껴진다. 아무리 만져 봐도 올끈볼끈 배긴 알통이 없다. 전사들의 직업은 원래 농부, 상인, 예술가. 시종일관 우물거리는 이들의 갑빠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비어를 뇌까린다. ‘난 남자도 아니다.’ 

칼싸움. 호장하고 경이롭다. 싸움의 시작은 분노. 그 뒤엔 모욕과 맹렬한 자기애에 빠진다. 머뭇거림 같은 건 없다. 목숨은 이미 자기 것이 아니다. 주검 위로 젱겅젱겅 칼이 부딪치고, ‘쑥꺽쑥꺽’ 몸이 베인다. 칼이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갈리고, 그 사이로 피가 튄다. 어마어마한 피. 잔인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간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신음하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전사들은 그 흔한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꿋꿋하다. 눈물은 여자만이다. ‘남자는 울면 지는 건가.’ 

특수효과. 영리하다. 장관이다. 핏물이 밴 파도가 몰아칠 때부터 짐작했다. 압권은 해전이다. 바다가 주는 신묘한 마력 그 이상을 연출한다. 물과 물결, 거품과 물방울, 파도와 배에 부딪치는 또다는 배. 똑똑한 점은 실제 같지만 실제 같지 않게 형상화한 점이다. 어딘지 모르게 고대 건축물처럼 고딕하고 신묘한, 예술 같고 판타지 비슷한 느낌을 준다. 특수효과가 영화를 살렸다. 특수효과는 주로 해전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짬짬이 살펴보면 여러 장면에 그 힘을 발휘한다. ‘저건 컴퓨터 그래픽이다.’ 

욕정. 자극적이다. 미성년자관람불가 이상의 격정, 피와 살이 타는 전쟁이다. 과시도, 무시도 없다. 참을성도, 인내심도, 미덕도 하찮다. 부자연스러운 희극도 삼갔다. 남자나 여자나 뒤틀린 욕망과 갈증에 충실했다. 지리멸렬한 전쟁이야말로 썩어버린 욕망. 갑작스러운 교접 앞에, '남자란 원래 저런 종자'라는 생각이 들어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발끈 성이 난 남자와 여자가 내뿜는 표호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전쟁과 섹스는 힘을 다해야 하는 일. 하지만 보는 사람도 매 한 가지다. ‘힘들어 죽겠다.’ 

의기. 일관성이 있다. 모든 장면이 불길에라도 알몸으로 들어갈 듯, 기세가 넘친다. 악착같은 의기는 ‘무던’의 표상. 침착하다. 사람 사는 곳에 악도, 이기도, 배신도 난무하기 마련이지만 남자는 담대하다. 이해가 넘치고, 뜻도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상의 정의와 평화를 생각한다. 작은 마음 씀씀이 또한 속악하지 않다. 지혜 또한 자못 양양하다. 사세 판단은 날카롭고 형국을 보는 눈은 넓다. 전술은 족탈불급이다. 지혜가 걸출한 자는 지략가, 싸움까지 잘하면 대장감인가. ‘입에서 단내가 난다.'’ 

예술작품, 눈길이 가는 곳 마다 쾌감에 젖는다. 따뜻한 온광으로 일렁인다. 으리으리한 신전과 섬세한 조형물, 검과 방패에까지 장식이 새겨졌다. 굳이 없어도 될 곳에 조각상이 놓여 있다. 돈 많이 들였다. 옛 그리스와 페르시아 도시는 복원되고 무너졌으며, 수많은 동상은 세워지고 쓰러졌다. 컴퓨터그래픽일 테지만, 이런 작품들을 영화에서 보는 것만으로 감동은 배가된다. 의상 또한 금속과 천을 적절하게 섞어 매혹적이다. 다 벗고 다니는 것만 빼면 좀 낫겠다 싶다. ‘명백한 관음증이다.’ 

 

 

페르시아의 전사 아르테미시아


미술사를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고대 그리스 미술은 서양미술의 근간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계급사회였다. 예술 또한 공공의 것이자, 왕이나 신관이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술가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폴리스는 달랐다. 신분이 낮은 사람도 국가의 일원이었고, 개인의 업적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예술가는 공을 인정받아 사회의 지도층이 됐다. 이들은 신전 하나를 지을 때도 일을 나눠서 하지 않았다. 개인이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만들었다. 이런 사회였기에 예술은 완벽을 추구했고, 진보적인 기법들을 계속해서 발명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건축과 미술은 이후 서양미술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젊고 이상적 남성 신체를 숭상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인체의 사실적인 모습을 형상화하려고 노력했다. 영화 <300: 제국의 부활>이 남성의 몸에 집착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근육질의 남자를 상술 정도로 표현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 고대 그리스의 분위기가 그랬다. 

이후 고대 그리스는 폴리스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가 확산되면서 창조력과 자신감, 이성에 대한 믿음이 상승했다. 그래서 작품에 고대 그리스인의 이상적 인간상을 투영했고, 인물을 닮게 만드는 동시에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봐왔던 ‘창을 던지는 포세이돈 또는 제우스’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이 만들어진 BC480년은 영화 <300: 제국의 부활>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뻔하다. 굳이 말을 붙여 할 필요가 없지만 간략하게 소개한다. 이 영화는 기원전 480년 9월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군과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 사이에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을 그렸다. 이 영화의 1편 <300>은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300명의 그리스 군대가 테르모필레의 고갯길을 막다 모두 전사한 이야기라면 2편 <300: 제국의 부활>은 300명의 그리스 군대가 싸울 때 아르테미시온의 해협에서 그리스 연합 함대와 페르시아 함대가 교전한 이야기다. 이 해전에서 수적으로 불리한 그리스 함대는 대규모 페르시아 함대를 폭이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해 대승리를 거뒀다. 이후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고, 이때부터 그리스 문명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을 이어가지만 영화적으로(허구를 덧붙여) 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