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12년 -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어, 스티브 맥퀸 감독 2013년작

2022. 10. 12. 21:05이야기/그래 그 영화

노예 12년(12 Years a Slave),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 감독 2013년작


미국의 슈베르트로 칭송받는 스티븐 콜린스 포스터(Stephen Collins Foster)가 작곡한 ‘올드 블랙 조(Old Black Joe)’.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이 노래를 들으면 슬픔이 들불처럼 번진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나의 기쁨과 젊음의 나날은 지나가 버렸네. 목화밭에서 일하던 내 친구도 없어졌네. 이 세상을 떠나 좋은 나라로 간 것을 나는 알고 있네. 그들이 부르고 있는 소리가 들리네. 올드 블랙 조라고. 나도 가리라. 곧 가리라. 그들의 상냥한 부름 소리가 들리네. 올드 블랙 조라고….”  

포스터는 늙은 흑인노예 조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 노래를 작곡했다. 하지만 슬픔의 지점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진정 슬픈 것은 ‘조의 죽음’이 아니다. 평생 노예로 살았던 ‘조의 삶’. 서아프리카에서 잡혀와 평생 노예로, 짐승처럼 살았던 ‘흑인 노예들의 애통한 세월’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포스터가 어찌 노예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다만 말할 수 없이 비참했던 흑인 노예의 삶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 노래가 더 이상 가슴 뭉클하고 아름답게 예찬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백인 주인에게는 모든 것이 용인된다. 노예의 생명을 거두는 일조차 예사롭다. 주인은 노예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거나 도망을 치면 총으로 쏴 죽인다. 잔인하게 고문한 뒤 목을 매달기도 한다. 그것도 웃으면서. 600불, 700불. 돈만 내면 발가벗겨져 전시된 흑인을 살 수 있다. 힘세고 건강한 총각, 예쁘고 순한 처녀는 값이 비싸다. 하지만 나이 어린 여자아이는 살 수 없다. 노예 상인은 나중에 비싸게 팔 수 있다고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영화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지만 그저 그렇고 그런 얘기리라.

주인은 채찍으로 노예의 맨살을 사정없이 후려갈긴다. 날카롭고 질긴 채찍이 허공을 가르자 살갗이 벌겋게 갈라지며 사방에 피를 뿌린다. 그 소리가 얼마나 끔찍한지 가슴이 쪼그라들 정도다. 노예는 가끔 주인의 노리개도 된다. 술 취한 주인을 위해 잠자다 말고 일어나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고, 옷도 벗겨진다. 학대와 부림에 매질까지. 하지만 살려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글도 알아서는 안 된다. 주인이 하는 일에는 토를 달지 말아야 하며, 옆에서 사람이 맞아 죽어도 모른 체해야 한다. 하지만 <노예 12년>은 영화 <만딩고>와 같은 상상 그 이상의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딱 그 정도만의 묘사만으로도 눈을 감고 싶어진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노예 솔로먼 노섭 (오른쪽)


미국에 노예 수입이 금지되자 자유주(州)의 흑인을 납치해 남부에 파는 일이 횡횡했다. 주인공은 유능한 바이올리니스트 ‘솔로먼 노섭’, 노예 이름은 ‘플랫’이다. 주인공은 화목한 가정과 음악가로서의 명성에 만족하며 사는 평범한 흑인이다. 자신과 같은 흑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는 소시민이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납치를 당한 후부터 산산이 부서진다. 손목의 쇠사슬을 찰까닥거리며, 힘없이 채찍을 맞으며 노예의 삶은 시작된다. 그제야 그는 지옥과 같은 현실에서 살고 있는 흑인들을 인식한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이후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영화 말미에 주인공은 다시 자유를 찾는다. 납치돼 팔린 노예 중 자유를 되찾은 이는 거의 없다. 신의 은총에 가까운 일이다. 그는 자유인이 된 뒤 흑인노예해방운동에 뛰어든다. 북동부를 돌아다니며 강의를 펼치고, 도망 다니는 노예들을 돕는다. 그러나 자신을 납치한 백인들과의 싸움은 긴 법정공방 끝에 흐지부지되고, 노예 주인과의 재판에서도 패한다. 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게 의문사한다. (이 문단의 내용은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해설로만 나옵니다.) 이 영화가 자신의 문제에만 매몰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이기를 꼬집는 대목이다. 

<노예 12년>은 한 인간의 얘기로만 보면 감동적이다. 실화가 주는 힘은 있다. 흑인 여자 노예가 주인공에게 “저를 늪지대로 데리고 가 제 목을 잡고 죽을 때까지 물속에 넣어주세요. 그리고 안 보이는 곳에 묻어줘요”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찍했던 그의 삶을 느끼게 한다. 그런 현실에서 주인공은 나무를 베고, 사탕수수를 잘라 모으고, 목화를 따면서, 장장 12년을 팔리고, 팔리며 살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역사와는 비켜섰다. 주인공의 이야기에 집중한 나머지 시대의식을 담아내지 못했다. 흑인 노예는 단지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마저 욕망의 도구로 전락시킨 산업자본주의 민낯이다. 이러한 배경을 모르고서는 영화의 감동이 배가되지 않는다.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경제는 남북으로 양분돼 있었다. 남부는 전통적인 면화농장이, 북부는 방직과 금속공업이 발달돼 있었다. 남부는 흑인 노예로 값싸고 질 좋은 면화를 생산해 영국에 수출했고, 영국은 이 면화로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미국에 역수출했다. 그래서 영국과 비슷한 산업구조를 가진 북부는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꼈다. 북부는 살아남기 위해 남부 면화산업의 동력이었던 흑인 노예를 해체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 북부 지역의 공장에서 일할 값싼 노동력을 찾는 일도 절실했다. 결국 경제적 이익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남부와 북부의 대립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의 명분은 노예해방이었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북부가 전쟁에 승리한 뒤 흑인 노예들은 저임금 노동자와 빈민으로 전락했고, 자유인이 됐지만 인종차별도 사라지지 않았다. 

흑인 노예들은 면화를 따면서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른다. 가볍고 흥겨운 노래지만 스테판 포스터의 ‘올드 블랙 조(Old Black Joe)’가 담아낼 수 없는 인생의 무게로 묵직하다. 힘겹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이겨내기 위한 이들의 노래가 구슬프게 들린 이유도 다르지 않다. 이 음악은 서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해 흑인음악으로, 재즈로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