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정현진 사진가 - 뒤늦게 깨달은 행복 '아타락시아'

이동권 2022. 10. 12. 21:31

정형진 사진가


사람들마다 다르다. 같은 장면을 봐도, 머릿속 저장 공간에는 모두 다른 게 들어가 있다. 자신이 관심 있는 것만 보고, 그것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정현진 작가는 누구나 한 번쯤은 봐왔을 풍경을 기록한다. 그의 작품을 쭉 둘러보면 우리 동네, 우리 이웃, 언제 어디선가 봤을 익숙한 곳의 이미지다. 하지만 샅샅이 기억 속을 들춰내 대조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의 작품은 특별하게 보지 않았던 풍경, 그래서 아예 기억 속에 담아두지 않은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놀랍다. 낯설지 않은 것에서 발견하는 새로움. 정 작가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특징이다. 마치 어떤 노력 없이도 휴식 같은 만남이 유지되는 친구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효율을 따진다. 의미를 담아내지 않거나 응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소모적이고 불편한 것이 된다. 사진을 찍는 행위, 혹은 결과물 자체도 그렇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그런 평가 자체가 불필요하다. 언제나 즐거움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옛 친구의 느낌이니까.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은 사진이라 참 좋다. 햇빛에 서로 다른 크기로 늘어진 그림자부터 잎사귀에 흘러내리는 물방울, 제집을 찾아 떠나는 민들레 홀씨, 어깨가 무거워 보이는 퇴근길 중년 남성,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앙증스러운 하트샷까지 가뜬하고 유쾌하다. 그러나 사진작가들을 보면 보통 도자기를 굽듯이 한 장의 사진을 뽑아낸다. 산고와 비유하는 작가들도 있다. 애초부터 사진을 대하는 사상 자체가 정 작가와 다른 것 같다. 

“한때의 아픔이 대상을 바라보는 눈을 크게 바꾸어 놓았고, 사진 찍는 생활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어릴 때 취미로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오래전부터 사진 촬영은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였다. 회사를 운영하게 되면서 틈나는 대로 카메라를 들고 여행하거나 수도권 주변의 산들을 두루두루 찾았다. 그러다 한 번 크게 아팠다. 동병상련이랄까. 병원 치료를 중단하고 주변을 산책하면서 연약한 풀들이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콘크리트와 천변 돌 틈 사이, 갈라진 산책로 사이 등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동물들은 삶의 터전을 언제든지 옮길 수 있지만 그들은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이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이겨내야만 한다. 지금까지 연약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오히려 강했던 것이다. 아플 때 많이 두려웠지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정현진 작가는 주변에 널려진 사물과 대화하듯이 셔터를 누른다. 그냥 긴장을 풀고 사물을 관조하면서 피사체가 그때그때 말하는 이야기를 엿듣는다. 사물은 특별하지 않다. 잡초, 연탄, 좌변기, 슬리퍼 등 평범한 일상의 사물이 그의 피사체다. 인물사진도 평범하다. 인간의 특별한 행위보다 일상의 생활을 담아낸다. 걷는 사람, 쉬는 사람, 웃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등이다. 그는 이 사진들을 엮어 사진집 <아타락시아>를 내놓았다. 사진집은 총 6개 부분으로 구성됐다. 형상, 사유, 동심, 사랑, 행로, 장면.  

“사진집에서 몸이 아플 때 찍은 사진들은 주로 ‘형상’과 ‘사유’ 부분에 실렸다. 불편한 몸을 서로 다독거리며 찍은 사진들이라 애착이 많다. 이후 몸이 차차 안정되면서 페이스북을 개설하고 해외 사진가 위주로 친구들을 사귀었다. 한국 사람들은 사진을 평가하려는 분들이 많았고, 사진을 느낌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 사진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 둘 공감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유럽의 저명한 소설가는 사진이 좋아 지인들과 즐겁게 공유했다면서 응원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주변에서 사진집을 출간하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했다. 국내 사진집들은 사진교습서, 풍경, 다큐가 주종을 이루다 보니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다. 그래도 사랑해주실 분이 계시리라는 마음에서 용기를 갖고 사진집을 내게 됐다.” 

정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푸른 하늘 구름 속으로 사라진 향수, 약속의 빛이 만발했던 사랑, 아니 어느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이름이며, 고향이며, 부모형제에 대한 자잘한 기억까지 모든 것이 생각난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왜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여태까지 보지 못하고 놓쳐 왔을까 싶어 깊은 애상도 느껴진다. 

사진이 곱다. 세상을 바라보는 정현진 작가의 따뜻한 시선도 느껴진다. 일반인들에게 멀기만 한 예술 사진이 아니라 이야기를 걸어주는 사진이니 외로워질 틈도 없다. 그의 사진이 공명을 주는 이유다. 그의 사진에서는 치열하고, 눈물 나고, 팍팍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슬그머니 미소를 짓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우리가 미처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일상의 모습이어서 더욱 그렇다. 

위트 넘치는 글도 시선을 끈다. 글이 사진의 힘을 더한다. 소개하자면, 사진집 첫 사진의 글은 ‘단비가 내리던 오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귀여운 병아리 삼 형제를 만났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말을 건네 본다. “너희들도 산책 나서는구나?”’이다. 생글생글 웃음을 제조하는 글이다. 하지만 그는 겸손하게 말한다. 

“처음에는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할 때처럼 사진에 대한 설명을 아예 넣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설명이 없다면 몇 초 만에 넘겨 버릴 것 같아 고민 끝에 내가 바라는 근처까지만 이끌기로 했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다. 혹여 초라한 글이 독자 분들의 심기를 건드려 놓지 않을까 여전히 걱정된다.” 
 
사진집의 제목 <아타락시아>도 그의 철학이 반영됐다. <아타락시아>는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행복의 필수 조건으로 말하는 ‘정신적 평정’의 상태를 말한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에 정통해 일체의 공포에서 해방된 자아, 종교적 미신에서 벗어난 이성의 인식의 최고조를 아타락시아가 있다고 했다. 그가 사진집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려는 이야기도 거기에 닿아 있다. 

“주변을 관심 있게 둘러보니 사랑스러운 피사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들려 굳이 먼 곳을 여행하면서 무언가를 갈구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됐다. 새롭거나 혹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나 자신과 주변은 등한시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멀리 있는 것보다는 가까운 것에, 바라볼 대상보다는 바라보는 내 마음에, 남들과 같은 이야기보다는 나만의 이야기를 하는 데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혼자 카메라를 들고 주변을 산책하는 것을 권유한다. 사진이 수학처럼 풀어가는 공식이 있거나 스포츠처럼 등수를 매기면서 단체로 즐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현진 작가에게 있어 사진은 놀이다. 결과에 연연하거나 상대를 의식하지도 않는다. 좋은 카메라도 필요 없다. 사정에 맞게 DSLR, 콤팩트 카메라, 휴대폰 등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정 작가는 자신이 사진을 찍는 행위를 ‘놀이사진’이라고 명명했다. 사진을 찍고 싶은데, 사진이 예술만 고집하면 망설여져서 찍을 수 없단다. 사진집 <아타락시아>가 바로 ‘놀이사진’의 견본이다.  

“생텍쥐페리의 마지막 작품 <성채>는 깊이가 있어 좋지만 <어린왕자>는 편하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어른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동화 같은 사진집을 만들고 싶었다. 사진집 중 ‘형상’과 ‘사유’ 부분은 이미지를 통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볼만한 내용을 다루었고, ‘동심’ 이후부터 ‘장면’까지는 과거와 현재의 삶을 가볍게 돌아보도록 했다. 특히 ‘장면’은 전반부의 경직성을 해소하는 구성이다.” 

정 작가는 ‘놀이사진’을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삶에 지치거나, 일상이 무료하게 느껴질 때 놀이사진이 제격이란다. 특히 그는 학생들에게 방과 후 숙제로 해보기를 권한다. ‘아주 평범하게 이야기하는 사진, 등수를 나눌 수 없는 사진, 그리고 스트레스 없는 사진이기 때문에 아이들 학업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덧붙여 그의 고향은 땅끝마을 해남이다. 어릴 적 기억들은 요즘 도시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공부 걱정 없이 뛰놀던 시절의 추억은 정 작가가 아이들에게 ‘놀이사진’을 권하게 된 작은 이유도 됐다. 

“대부분 사람들은 무언가를 알려고 할 때 책이나 학원 같은 손쉬운 방법부터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배움을 얻은 뒤에는 남들과 그 차이를 비교하고 싶어 한다. 아마도, 그것은 학창시절 몸에 익은 것이라 생각된다. 사진을 해오면서 적지 않은 사진가들이 눈에 보이지 않은 교복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사진을 놀이라고 생각하면 달라진다. 놀이는 상대를 의식할 겨를 없이 즐기는 것이다. 잘 놀았는지, 못 놀았는지 상대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으며, 긴장을 풀고 놀다 보면 놀이 상대로 깊숙이 알고 친하게 되며, 스스로 또한 즐겁고 심신이 건강해진다. 놀이사진은 자연에서 뛰놀며 배우는 현장학습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먼저 교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으면 한다. 그런 다음 나를 잘 이해하고 나와 통할 수 있는 대상을 찾고, 그 대상을 발견하면 그 친구에게 내면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마음대로 드러내길 바란다. 방법이 서툴더라도 진솔한 마음을 이야기한다면 고귀하다. 그 느낌을 충실하게 프레임에 담아낸다면 최고의 사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