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05. 집안을 세운 복덩이

이동권 2021. 11. 15. 13:32

어린 시절 경대


집안에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모든 일이 술술 풀렸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처럼 불안한 일이 생겨날 법도 한데, 경대가 태어난 후로는 액땜이라도 한 것처럼 좋은 일만 생겼다. 


아버지는 무엇을 해도 영업이 잘 됐다. 모르는 곳에 가더라도 거래가 쉽게 이뤄졌고, 자신을 찾는 고객이 점점 늘어 1등 영업사원이 됐다. 


덩달아 살림도 크게 불었다. 말씨도 다르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낯선 서울생활이었지만 명랑하고 쾌활한 아버지의 성격 덕분에 사람들이 다들 좋아했고, 때때로 보여주는 진지함과 정직함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아버지는 6남매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형제가 많은 집이 대부분 그랬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힘으로 성공을 이뤄냈다.


아버지는 어릴 때 축구선수였다. 하지만 당시 축구나 야구처럼 단체경기를 하는 운동선수는 성공하기 힘들었다. 지금처럼 실업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운동을 열심히 하다 그만두면 자연히 공부에도 멀어져 남 밑에 들어가 장사를 배우거나 낙향해 농사를 짓는 게 다였다. 좋은 회사는 고사하고, 취직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경대가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해서 걱정했다. 혹시 경대가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하면 어쩌나, 고민이 많았다.


경대는 어렸을 때 합기도를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는 야구를 즐겼다. 글로브와 야구방망이를 들고 프로야구 경기를 보러 다녔다. 고등학교 때는 축구를 좋아해 친구들과 땀을 흘리며 공을 찼다. 아버지는 그런 경대를 보면서 걱정이 많았다.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대가 운동을 흥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잘하는 게 운동밖에 없었던 아버지는 취직할 곳이 마땅치 않아 영업직을 택했다. 지금은 영업직에 대한 인식이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전혀 알아주지 않는 직종이어서 대우가 형편없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자신을 받아준 회사를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걷고 뛰어다녔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책무도 컸다. 사람들과 섞여 놀고도 싶었고, 젊음을 흔들어놓을 만한 유혹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다른 마음을 먹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지칠 줄 모르는 아버지의 부지런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로 나타났다. 아버지는 입사 3개월 만에 영업부에서 1등을 했고 그후로 계속 1등 자리를 지켰다. 그 당시 공무원의 월급이 2만 원일 때 12만 원을 받았고, 동료들의 매출이 1천만 원일 때 1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신화’ 같은 일이었다.


아버지는 취직한 지 1년 만에 산동네에서 벗어나 단독 주택을 장만했다. 열심히 일한 결과였지만 운도 따랐다. 그해 6월에 석유파동3)이 나서 전국의 부동산 값이 두 배, 세 배로 뛰었다. 10만원에 산 집이 20만원, 30만원이 됐다. 경대 집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산동네 집을 처분하면서 뜻하지 않게 재산을 늘려 나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입술에서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조금만 더 열심히 살면 더 좋은 집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돈 버는 재미’가 솔솔 느껴졌다. 하지만 워낙 가진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을 아끼고 절약하지 않으면 살림을 불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이사 간 집은 방이 세 칸에, 마당에는 물 펌프가 있었다. 주택가라고 하지만 이 동네도 수도가 있는 집은 드물었다. 아버지는 방 두 칸을 전세로 내놓고 한 방에서 네 식구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가 영업사원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직’이었다. 아버지는 괄괄한 것 같으면서도 옳고 그름이 확실했다. 그래서 고객들은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아버지가 회사를 대하는 마음도 그랬다. 일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지금처럼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준 회사에 충심을 다했다. 


영업 실적이 좋은 사람들은 다른 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큰돈을 벌게 해 준 회사를 배신하지 않았다. 어떤 조건을 제시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쫓아내면 나갔지 먼저 배신하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하지만 사장은 아버지가 다른 회사로 옮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월급 대신 별도로 돈을 찔러주기도 하고, 다른 회사보다 후한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아버지를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1등 영업사원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간절함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사사로운 가정문제까지 돌봐주면서 고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집안 대소사는 물론 적재적소에 필요한 것들을 일일이 챙겼다. 그래서 아무리 냉랭하고 차가운 고객도 아버지 앞에서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돈을 갚을 길이 없어 막막한 고객에게는 돈을 갚으라고 하지 않았다. 먼저 집과 회사를 방문해서 사정이 정말 어려운지 직접 확인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허풍을 떨거나 거짓으로 지불을 미루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운 사정을 직접 확인하면 쌀 한 가마니와 아이들에게는 과자를 사주고 채무자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거래를 끝맺었다. 막무가내로 돈을 받아내면 채무자가 재기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영업 방식은 냉담과 무관심으로 둘러싸인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돈 갚을 생각 하지 말고 가정을 살리세요. 쌀이 떨어지면 얘기하시고요. 잘 될 겁니다. 힘내세요.”


고객들은 이 세상의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도움을 받고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움을 전했다. 나중에는 아버지에게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찾아와서 은혜를 갚겠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도 아버지는 고객의 집에 가서 집안 사정을 재차 확인한 뒤에야 돈을 돌려받았다. 


이러다 보니 영업은 정갈하게 묶인 매듭을 푸는 것처럼 막힘이 없었고, 시간이 지나도 고객과의 관계가 끈끈하게 유지됐다. 사람들은 ‘영업사원이니까 잘하는 거겠지.’ 라고 의심하면서 경계하던 마음을 버리고 아버지를 진심으로 대했다. 


아버지는 삶을 행복하게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을 ‘서로 돕고 협력하는 삶’ 속에서 찾았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배려해주면, 없는 사람이 힘을 받고 성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회가 다 잘 살아야 하는데 없는 사람이 죽으면 있는 사람도 죽고 전체가 망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서울 와서 고생을 해본 자신의 경험이 깔려 있었다. 


반면 아버지는 불량한 고객에게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마음의 선을 긋고 엄격하게 대했다. 대신 좋은 사람, 살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앞날을 살펴줬다. 허심탄회하게 가진 것을 나눴고, 의지할 품을 열어주었다. 잘 곳이 없으면 집에 데려와 재우기까지 했다. 그래서 경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데려온 손님과 함께 잔 적이 많았다. 여분의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대는 가끔씩 손님들이 같이 자자고 말을 걸어오면 나긋나긋하게 예의를 갖춰 대답했다. 


“삼촌, 주무시는데 방해하지 않을게요. 여기서 주무세요.”


손님들은 의젓하고 살갑게 대하는 경대가 대견스러워 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아주었다.


경대는 아무런 불만 없이 불편을 감수했다. 투정조차 부리지 않았다. ‘왜 내 방에서 재우냐’고 한 번쯤은 떼를 쓰며 조를 만도 했지만 경대는 못마땅한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아버지를 믿고 따랐으며, 아버지의 삶을 관조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하나하나 흡수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 학교 갈 때, 공부할 때 경대를 너무 방관했던 것 같아 자신이 더없이 밉다.


“집에 만날 손님이 찾아오니까, 잘 방이 없어서 경대랑 같이 재웠는데. 그 어린 시절에도 불평 한마디 없이 따르던 경대가 떠오르네요. 좀 더 잘해주고 챙겨줬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3) 1973~1974년과 1978~1980년, 국제석유가격 상승으로 세계경제는 불황에 휩싸였다. 이로 인해 한국의 경우, 경제성장률은 3%이하로 낮아진 반면 소비자 물가는 30%이상 상승할 정도로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만연했다.

 

고교 시절 경대
부모님과 함께 산소에 간 경대
경대의 휘문고등학교 졸업식

 

' > 강경대 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007. 예쁘고 인사 잘하는 어린이  (0) 2021.11.15
006. 검소한 천하장사  (0) 2021.11.15
004. 퍼주기 좋아하는 경대  (0) 2021.11.15
003. 경대는 장군감  (0) 2021.11.15
002. 1부 - 푸르디푸른 꽃씨  (0) 2021.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