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강경대 평전

004. 퍼주기 좋아하는 경대

이동권 2021. 11. 15. 13:23

가족들과 함께한 야유회

 

1970년대 민중의 삶은 열악하고 처참했다. 1966년 말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한 경제는 대량 실업사태까지 불러 대부분의 가정은 생활이 궁색하기 그지없었고, 먹고사는 일조차 힘에 부쳐했다. 그래서 허리조차 펼 수 없는 좁은 곳에서 일하던 공장 노동자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고, 끼니조차 때우지 못한 빈민촌 사람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해 들고일어났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불만을 짓누르기 위해 ‘국가 안보 저해’, ‘용공’이라는 딱지를 붙여 탄압하고 잡아들이기를 밥 먹듯이 했다. 


강경대가 태어난 산동네 사람들의 삶도 열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점심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경대 집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집세 걱정 없는 자택에, 방도 두 칸이나 됐다. 그래도 어머니는 남매를 잘 키우려는 욕심에 이를 악물며 살림을 꾸렸다. 그렇다고 욕심을 부리거나 나만 알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일하고 알뜰하게 모아서 기반을 닦아가기를 원했고, 그것밖에 몰랐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자 우리네 어머니의 자화상이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경대를 낳기 전까지는 선미를 방에 눕혀놓고 아랫동네에서 물을 길러다 먹으며 돈을 모았다. 검은 눈망울을 굴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자식을 위해 단돈 10원이라도 아껴야 했다. 하지만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경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집안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팔다리가 서너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물을 사먹기 시작했다. 그 당시 물 값은 10원이었고, 길어다 주면 20원을 받았다. 


어머니는 살림을 키우는 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태어나면 누구나 맞아야하는 홍역 예방주사를 경대에게 맞추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는 경대 몸에 열꽃이 피기 시작하자 당황했다. 이제나 나을까, 저제나 나을까 전전긍긍하며 사나흘을 정신없이 보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홍역으로 이승 반, 저승 반 하다가 세상을 떠난 아이를 많이 봐서 잔뜩 걱정이 됐다. 이대로 잘못되면 어쩌나 덜컥 겁도 났다. 


다행히도 경대는 구렁이 담 넘어 가듯 홍역을 자연스럽게 넘겼다. 눈이 감긴 상태에서도 요구르트를 마시고, 냉수에 만 밥을 먹으면서 이겨냈다. 이렇게 병을 이겨내서인지, 경대는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경대는 큰 소리를 내고 울어본 적 없이 컸다. 앉아 있을 때나 걸어갈 때나 힘찼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고,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큰 소리로 울기보다는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경대는 동네 어르신에게도 잘했다. 어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밝고 순한 얼굴로 정답게 인사를 건네며 학교를 오갔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오냐. 경대 학교 가니?”
“예. 할머니. 건강하시죠. 무거운 것 들지 마세요.”


할머니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리를 저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경대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대가 자라는 모습은 부모님에게 기쁨이었다. 아니, 경대가 오면 온 집안이 즐겁고 명랑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부모님은 경대에게 감사했다. 지식을 키우는 것이 인생의 낙이라고 하지만 경대는 특별했다. 이렇게 경대는 기쁨과 지혜, 유머와 감동이 함께 어우러진 가정환경에서 낭랑한 소년으로 성장해갔다.


경대의 집은 경로당 같은 분위기였다. 동네 할머니들은 만날 놀러 와서 밥을 먹곤 했다. 대부분 점심을 굶다시피 하는 할머니들이었다. 어머니는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정성껏 음식을 대접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잘 사는 사람이 내놓아야지’ 하는 마음이었고, 함께 나눠먹는 것이 좋았을 뿐이었다. 경대 할머니도 사람을 좋아해서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동네 어르신들도 경대 할머니가 베푸는 호의가 진심인 것을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먹을 것을 청했다. 


사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어른신들을 대접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시어머니를 모시는 데다 밥이며, 청소며, 빨래며, 두 아이의 뒷바라지까지 만만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 밥이 그랬다. 


경대 집을 찾는 동네 어르신들이 늘면서 밥은 늘 부족했다. 어떤 날에는 일인당 밥 한 숟가락마저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럴 때 어머니는 묘안을 짜냈다. 밀가루를 반죽해서 수제비를 끓이고, 밥을 한 숟가락씩 나눠 드리는 방법이다. 


그 시절에는 밥을 하는 일 자체가 힘들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물을 맞추는 일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침에 밥을 지을 때 점심까지 해결할 만큼 양을 넉넉히 해서, 밥이 식지 않도록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 아랫목에 넣어두고 때가 되면 꺼내 먹곤 했었다. 


어머니는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에도 퍼주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떡 같은 것을 해서 나눠먹는 것을 좋아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경대도 함께 나눠 먹는 것을 좋아했다. 식탐이 많을 나이에도 가족들의 입에 먼저 넣어주었고, 누나 몫은 꼭 남겨놓았다. 어머니를 꼭 빼닮은 행동이었다. 


경대는 친구들도 잘 챙겼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눠 먹는 것을 원칙처럼 지켰고,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어머니가 해주는 간식을 함께 먹는 것도 좋아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경대를 잘 따랐고, 함께 어울리고 싶어 했다. 


“얘들아 우리 집에 가자. 엄마한테 떡볶이 해달라고 할게.”
“집에 가도 괜찮아?”
“응. 엄마가 밖에서 군것질 하는 것보다 집에서 먹는 것을 좋아하셔.”


어머니는 경대가 친구들을 데리고 오면 피곤한 기색 없이 일일이 말벗을 해주며 음식을 내놓았다. 경대 친구들을 모두 자기 자식처럼 생각했다.


경대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이른 아침, 경대는 일어나자마자 졸린 눈을 비비며 도시락을 싸고 있던 어머니의 어깨를 주물렀다. 


“엄마한테 할 얘기가 있구나?”


어머니는 경대의 다정스런 손길을 느끼며 말했다. 


“엄마, 오늘 도시락 좀 많이 싸주세요.”
“무슨 일 있니?”
“친구 엄마가 일을 나가서 도시락을 못 싸오거든요.”
“알았어, 우리 아들.”


어머니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도시락을 싸줬다.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고 반찬도 가득가득 담았다. 경대는 그런 어머니를 무한한 사랑의 눈빛으로 쳐다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엄마, 최고예요.”


경대는 책가방보다 무거운 도시락을 싸들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불평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든든한 어깨에 사랑을 가득 싣고 가는 마음은 무거운 것조차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어머니는 경대가 학교 가는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누구나 배운 대로 하는 거라지만 진실하고 착한 마음을 가진 아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때론 바보스러울 정도로 연민이 많고 마음씨가 좋아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경대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모자는 이런 점이 통했다. 무엇이든지 주고, 나눠먹는 것을 좋아했다. 

 

간식을 먹고 있는 경대
카메라를 들이대자 재밌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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