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어지간히 시달린 모양이다. 먹고살기도 팍팍한데 곳곳에서 “행사비도 부족하고… 좋은 일이니 재능기부로 해달라”고 요구한다. 불우한 이웃을 돕는 행사란다. 거절하자니 인간성의 밑바닥을 보이는 것 같다. 자신보다 훌륭한 ‘대가’들, 경제적 상황이 좋은 예술가들이 허다하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말도 꺼내지 못하면서 공짜를 요구하는 행사 기획자들이 얄밉다. 그래서 넌지시 그런 사람들한테 연락해보라고 꽁무니를 뺀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은 바빠서 못 온다”는 사정이 뒤따른다. 남자는 할 수 없이 재능기부를 한다.
재능기부, 남자는 즐겁지 않다. 막일이라도 해야 입에 풀칠할 판이다. 자연스레 행사는 무기력하고 퇴영적으로 흐른다. 화려한 조명이 꺼지고 집에 가는 길. 과일 한 봉지 사들고 갈 돈도 없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친구를 불러내 대포 한 잔 마시고, 밤늦게 조용히 집에 들어간다. 여자는 자지 않고 남자가 오길 기다린다. 한 집안의 가장이 일을 하고 왔으니, 여자는 당연스럽게 눈에 쌍심지를 켠다. 재능기부라지만 설마 공짜? 하지만 불알 두 쪽만 대그락대그락한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린다. 거리에는 벌써부터 누구누구의 ‘재능기부’라는 타이틀로 장식된 행사 포스터가 깔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두렵다. ‘뜻깊은 행사’를 내세워 재능기부를 강요하는 기획자들의 심보에 농락당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마음이 쓰인다. 한두 번이었다. 더 이상은 재능기부할 여건이 안 됐다. 하지만 기획자들은 제멋대로 남자를 재능기부자로 불렀고, 재능기부가 만능인 것처럼 당당하게 요구했다. 좋은 기운을 얻고 싶어 시작한 일이 안 좋은 기억들만 줄줄이 남겼다.
남자는 故 최고은 작가가 떠오른다. 그녀는 월세 20만 원 지하단칸방, 차디찬 전기장판 위에서 아사했다. 그녀가 가진 것이라고는 라면 5봉지와 빵 반 조각. 그리고 대문에 쓰인 ‘밥이나 반찬 남는 것이 있으면 도와주세요’라는 쪽지가 다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재능기부를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불편해서 요즘에는 피해 다닌다는 한 예술가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써봤다. 예술가들의 삶은 어렵다 못해 궁색하다. 월평균 수입이 100만 원도 안 되는 예술가는 100명 중 86.6명, 월평균 수입이 아예 없는 예술가는 무려 41.3명에 이른다. 4대 보험 가입률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테다.
학교에 한 번 가보자. 예술대 졸업생들 중 전업 작가가 된 학생들은 거의 없다. 학교에 다니면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미래는 불투명하다. 게다가 졸업 후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 하나둘씩 예술가의 꿈을 접는다. 예를 들면 미술대 졸업생 10명 중 9명은 결혼을 하거나, 취직을 하거나, 개인사업자가 된다. 취업을 해도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요즘에는 허울 좋게 재능기부라는 얘기까지 덧붙여졌다. 도대체 예술가들은 뭘 먹고살라는 소리인가.
재능기부는 개인이 가진 재능을 활용해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다. 다양한 요구에 맞춰 재능도 따라가니, 기부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만족할만한 형태의 봉사다. 그러나 재능기부는 당사자의 선의가 바탕이 돼야 값지다. 좋은 일이니 해달라고 강요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도외시해버리는 현실에서 따뜻한 마음은 우러나지 않는다. 또 재능기부는 무조건 무료라는 생각도 옳지 않다. 예술가들의 좋음 마음과 열정을 이용해 사욕을 챙기는 일도 금물이다. 한 지인이 피를 토하듯 쏟아내는 하소연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좋은 일에 재능기부하는 것은 좋다. 작가들이 알아서 재능기부할 일은 한다. 근데 강요를 한다. 먹고살기도 힘들고, 좋은 일이니 거절하기도 힘들고. 이중고다. 돈을 낼 것은 내야 한다.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나쁜 놈들이 많다. 유명한 작가들한테는 말 못 하고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재능기부가 문화계 전반적으로 퍼져있다. 그것이 마냥 좋은 일인 것처럼. 재능기부가 작가를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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