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생각나무

이념을 떠나 다시 평가받아 마땅한 이름 ‘정율성’

이동권 2023. 8. 22. 15:47

중국의 3대 음악가로 불리는 정율성(1914년 7월 7일 ~1976년 12월 7일) ⓒ전북도청 제공


2014년 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을 방문한 중국 시진핑 주석이 음악가 ‘정율성’을 한중관계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았다.

정율성은 전남 광주 태생으로 1930년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전개하며 중국공산당에 몸담았다. 그는 중국공산당의 혁명 근거지였던 연안을 찾아가 ‘팔로군 행진곡’, ‘연안송’ 등 많은 곡을 남겼고, 신중국 성립 이후엔 건국에 공헌한 100명의 영웅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은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식 군가다.

시진핑 주석의 말처럼 정율성이 중국 건국에 기여했으니 그는 한중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그가 중국 군가뿐만 아니라 북한 군가를 작곡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제식민지 시절 중국공산당에 참여했으니 매우 당연하게도 해방 직후에 정율성이 찾은 곳은 광주나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었다. 그는 초기 북한과 중국 관계에서 매우 큰 역할을 한 정설송(丁雪松, 딩쉐슝)의 남편이었고, 북한 공식 군가인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을 작곡했으며, 한국 전쟁 초기에 중국 주은래 총리의 요청으로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중공군 소속으로 전선 위문활동을 했다. 

정율성의 북한 활동은 딱 거기까지였다. 북한에서 그의 활동이 지속되지 않은 것은 북한 내부의 정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중국 국적자로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 정율성이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2012년이다. 당시 <KBS>는 광복절을 맞아 <KBS>스페셜 <13억 대륙을 흔들다 – 음악가 정율성> 편을 통해 그의 행적을 조명했다. <KBS>의 보수 쪽 이사들은 그의 사회주의 활동을 문제 삼아 불방을 종용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 프로그램은 전파를 탈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정율성’이라는 이름이 지닌 간단치 않은 맥락을 보여줬다.

그러나 2년 뒤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찾아 정율성이라는 이름을 거론했을 때 우리 사회에서는 아무런 논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도, 언론들도, 태극기 부대도 그 어떤 토조차 달지 않았고, 곱게 시 주석을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리 사회가 정율성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윤 정부는 광주시가 2020년 5월에 발표한 ‘정율성 역사공원’ 건립 사업 계획에 이의를 제기했다. 최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페이스북에 “하늘에서 정율성 찬양미화작업을 지켜볼 독립지사와 호국, 민주화 영령들이 얼마나 통탄할지 솔직히 부끄럽다”며 역사공원 건립 전면 철회를 요구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정율성에 대해 못마땅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단지 정율성의 이름을 입에 올린 사람이 초강대국으로 올라선 중국의 최고 지도자였기 때문에 박근혜 정부조차 ‘감히’ 시비를 걸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광주시는 총 48억 원을 들여 올해 연말까지 공원 조성을 완료할 방침이다. 왜일까? 이념을 떼어 내고 음악만 생각하면 그 이유는 미리 짐작이 가능하다. 

정율성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음악가로서 고향인 광주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민족 모두에게 기억될만한 인물이다. 이념을 떠나 그의 음악만큼은 어떻든 다시 평가받아 마땅하다. 기념이나 우상화가 아닌 음악가로서의 평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