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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 - 과도한 행복에 담은 인간의 고통과 절망, 질레 보르도 감독 2014년작

이동권 2022. 10. 11. 16:33

르누아르(Renoir), 질레 보르도(Gilles Bourdos) 감독 2014년작


화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익숙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렇고, 앙리 루소와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렇다. 모두들 엉뚱했고 괴짜였다. 빈센트 반 고흐 같은 경우는 그 이상의 파격이었다. 그는 한때 성직자의 길을 열망하는 청년이었지만 신경쇠약을 앓다 자신의 귀를 잘라냈고, 권총으로 자살했다. 한마디로 파란만장했다. 

반면 ‘르누아르’는 오롯이 장인의 길을 걸었다. 부족한 것 없는 예술가로 살았고, 화가로서 명성을 누렸다. 그는 13살 때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대성할 화가의 면모를 보여줬다. 청년기에는 아틀리에에서 세잔, 피사로,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며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를 형상화했고, 이후에는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면서 세계가 주목하는 명화를 완성해 나갔다. 늙어서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와중에도 손가락에 붓을 묶고 그림을 그리면서 죽는 날까지 창작의 기쁨을 누렸다. 

르누아르의 삶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한 폭의 그림 같다. 깨끗하고, 고상하며, 예술가의 표본이다. 그의 작품도 피로를 느끼게 하거나 싫증을 유발하지 않는다. 유연한 빛깔과 형상으로 사람들에게 행복과 평온을 선사한다. 하지만 세상 풍파에 휘말리지 않았던 르누아르에게는 화가 그 이상의 매력이 발견되지 않는다. 소박하고 평온한 삶의 태도가 죽는 날까지 값진 것이라고 해도, 그러한 삶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삶은 도전할수록 파편이 튀기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르누아르의 삶은 도식적이고 자기 방어적인 면도 보인다. 

하지만 ‘북데기 속에 벼알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평범한 곳에 가장 값진 것이 있다’는 뜻이다. 프랑스 예술영화를 대표하는 질 부르도스 감독은 노년기 화가 그 너머의 사생활로 르누아르를 말한다. 최고의 누드모델이자 연인인 ‘데데’를 놓고 벌이는 르누아르 부자의 사랑을 통해 화가 르누아르를 재평가한다. 

르누아르는 늦은 나이에 20살 연하의 처녀와 결혼할 당시 스스로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를 만나면서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겪는다. 예술과 교감하고, 영혼의 깊이를 가늠하는 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기 위해 마지막까지 불굴의 투혼을 발휘한다. 심연과 같은 예술의 세계로 빠져들어 자신의 철학과 화풍을 완성하려고 한다. 하지만 완성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 ‘데데’였다.  

 

 

그림을 그리는 르누와르


프랑스 리비에라 지방. 1915년 여름. 르누아르는 74세, 차남 장 르누아르는 21세의 청년이다. 전쟁에 참전해 부상당한 장은 몸을 회복하기 위해 집에 머문다. 르누아르는 두 아들을 모두 전쟁터로 보낸 뒤 홀로 슬픔을 감내한다. 그것이 아들의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도 아들과 바꿀 수 없는 것이 화가로서의 열정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우연처럼 르누아르에게 누드모델 데데가 나타난다. 자신의 예술을 완성해줄 완벽한 누드모델. 그러나 그 옆에는 데데를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는 차남 장 르누아르가 있다.  

영화 <르누아르>는 첫 장면부터 르누아르의 창백한 마음을 꿰뚫어 보든 듯 시원하게 바람이 불면서 커다란 나뭇가지를 흔든다. 이 영화는 영상미가 뛰어나다. 아름다운 명화와 풍경이 어우러져 눈을 즐겁게 한다.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따뜻한 색상과 빛의 달콤함에 저절로 빠져들 것이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미장센에는 모두가 반할만하다. 아울러 영상을 타고 넘으며 귀를 간질이는 음악은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백미다. 거기에 세계적인 감독으로 성장한 차남 장 르누아르의 젊은 시절과 1차 세계대전에서 공군 비행사로 활약하던 모습도 이채로움을 선사한다. 

르누아르는 평생 행복과 기쁨의 순간을 그렸다. 사회 문제나 인간 내면의 고통보다는 풍성한 몸매의 나체 여성들을 소재로 외면적인 즐거움과 행위만을 화폭에 담았다. 두 아들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당시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림은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 “그림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자 철학이었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볼 때마다 명화가 꼭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원화를 직접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행복한 여성이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영화 <르누아르>를 보면서 사고가 조금 바뀌었다. 르누아르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과도한 행복과 기쁨의 순간으로 은유해 담아낸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끝없는 절망을 넘어서려는 희망과 자신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인내가 그의 그림 속에 내포된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됐다. 전쟁에 나가는 아들을 막지 못하고 속으로 아픔을 감내하는 그가 잔상처럼 계속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그림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점이다. 눈동자를 빨아들이는 보드라운 장밋빛 광채, 물속을 노니는 비단잉어의 샛노란 타오름, 빛이 확 번지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짙은 남색 그림자, 보드랍게 가지를 늘어뜨린 채 가볍게 말려들어간 나뭇잎의 푸르름 등 이 모든 색채가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들면서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