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그래 그 영화

레드툼 - 보도연맹사건 다룬 다큐멘터리, 구자환 감독 2013년작

이동권 2022. 10. 10. 21:19

레드툼(Red Tomb), 구자환 감독 2013년작


죽음은 편작도 무용하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최고의 공포다. 영문도 모른 채, 어처구니없는 연유로 끌려가 죽었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끔찍한 공포가 전신을 옥죈다. 직접 목도하지 않아도, 소름이 돋고 울분이 치민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죽일 수 있었을까. 영화 <레드툼>. 고통과 비애에 젖은 눈물이 앞을 가리게 만드는 다큐멘터리다. 

<레드툼>은 지독하고 가혹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된 피투성이 얼굴들을 하나하나 되살려 위로한다. 위로는 다름 아닌 올바른 재생이다. 재물이나 제사가 이제 와서 어떤 위로가 되겠는가. 이들의 죽음에 대해 올바르게 기억하고, 그 영혼이 남긴 의미를 현세에서 똑바로 재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로다. 이 영화는 얘기한다. 먼저 알자. 그리고 잊지 말자. 그 자체만으로도 끊어진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를 여는 가교다. 

국군과 경찰, 우익청년단원은 1950년 6월 25일부터 약 3개월 동안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을 검속했고, 교전 상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즉결처분했다. 북한군에 동조할 수 있다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이 가정은 인간의 존엄성 저 밑바닥까지 짓밟았다. 죽은 이들은 사상이 뭔지도 모르는 양민이었다. 학생, 처녀, 아버지 대신 죽은 아들, 아이 업은 엄마, 농부. 공산주의가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세력을 관리하고 회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공무원들의 지나친 실적주의와 지역 할당제로 일반인까지 연맹에 이름이 올라가게 됐다. 이 사건으로 학살당한 양민의 수는 무려 20~30만 명. 만약 이 사람들이 지금까지 우리의 형제자매로 살아있다면 어떠했을까. 진상규명과 함께 이 영화가 던지는 또 하나의 물음이다. 하지만 보도연맹사건은 치부를 가리듯 철저하게 은폐돼 주검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혔다.  

잠들어 있는 보도연맹사건을 깨운 건 구자환 감독이다. 구 감독은 2004년부터 전국의 학살 장소 가운데 창원, 밀양, 진주, 거제, 통영, 창녕 등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취재와 인터뷰해 이 영화를 제작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제목을 고상하게 <레드툼>으로 지었다. 한국어 그대로 번역하면 ‘빨갱이무덤’이다. 아마도 구 감독은 ‘빨갱이무덤’이라는 제목이 더욱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진실을 알리려는 이 영화의 본분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제목이다. 그럼에도 <레드툼>을 쓴 건 우리 사회의 무서운 선입견을 시사한다.   

‘더 많이 알리려면 영화 제목은 <레드툼>이어야 한다.’

 

 

영화 속 장면


평화로운 농촌, 수려한 산하금대에서 외마디 비명과 구슬픈 곡소리가 들려온다. 구천을 헤매는 영혼들을 향해 가족들이 제를 지내면서 울부짖는 호곡이다. 바다에는 하얀 국화가 뿌려졌다. 해류를 따라 해안가 마을로, 저 멀리 일본 대마도까지 흘러간 영혼을 달래는 헌화다. 영화를 보면서 울음을 참지 못한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놓고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이 영화의 전반에 흐르는 정서가 인간의 본연의 감정과 크게 닿아 있기 때문. ‘죽음’이다. 비천하고 모순된 것으로 넘치는 것이 인간사다. 한낱 인간들이 하는 일이니, 눈물을 쥐어짜는 영화를 봐도 콧방귀를 뀌곤 한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그 이상을 넘어서면 저절로 눈이 감긴다. 이들의 죽음은 예사롭지 않다. 

<레드툼>에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등장한다. 모두 부모형제, 친구, 이웃의 억울한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얼굴에는 고통과 탄식이 엉켜 슬픔이 두껍게 쌓여 있다. 축 늘어진 눈꺼풀과 구김살에까지 눈물이 주렁주렁 맺혔다. 이들의 얼굴은 작금의 한국 사회가 인간과 생명의 존엄을 철저히 파괴한 가운데 세워진 것을 증명한다. 한국 사회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것들이 틀어지고 훼손되면서 굳혀졌다. 잘못 채워진 첫 단추의 결과다. 가장 비근한 예로 ‘친일청산’이 있다. 

이 영화는 연신 놀라운 이야기들을 쏟아 낸다. 이야기의 고갱이는 한결같다. 믿기지 않은 진실을 계속해서 떠올려야 하는 분통이다. 보도연맹 희생자 대부분은 이념과 관계없이 억울하게 죽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끌려가 외마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절명했다. 이념을 빌어 벌어진 생명말살의 비극, 매카시즘의 참상이다. 해방 이후 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몰렸다. 조금만 밉보이면 몽둥이로 개 패듯이 맞았고, 입만 열면 잡아가니 입도 뻥끗 못했다. “군수나 면장이나 경찰의 말을 안 들으면 빨갱이”로 몰려 무조건 죽임을 당했다. 총살을 당하고, 산 채로 묻히고, 바다에 빠뜨리고, 일본도로 목이 베어졌다. 총살을 당한 뒤 살아남는 사람이 없도록 확인사살도 이뤄졌고, 수장당한 사람들이 줄이 풀려 해변으로 다가오면 기다렸다가 조준사살도 했다. 과연 죽은 이들은 ‘빨갱이’였을까. 

이 영화는 ‘아니’라고 말한다. 

 

“강간에 응한 여성은 살려줬고,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독립운동가도 상당수 있었다”고 전언한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참황도 읽어준다. “처음에 친일세력인지 몰랐고요. 지나고 보니까 전부다 일본인 밑에 과수원 지배인 하던 사람, 간장 공장 공장장 하던 사람, 그 사람들이 해방되고 나니까 전부 다 유지가 돼 있고, 일본 사람 집을 다 차지하고 있는 거지예. 이 사람들 중심으로 면장이 나오고. 이 사람들이 그때 보도연맹 명단을 만들 때 참여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예.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이름을) 적어 넣었고, 무조건 끌고 가 다 죽인 거지요.”  

보도연맹사건은 현재도 유효하다. 죽음의 공포는 오늘날까지도 비수처럼 가슴을 찌른다. 유족회 위령제. 술잔과 절을 올리는 가족들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쏟아진다. 통곡의 세월 앞에 참았던 설움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남편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아내,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는 아들딸들은 빨갱이 가족,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멍에를 쓰고 연좌제라는 형극의 길을 살아왔다. 아직도 희생자의 유족들은 빨갱이로 몰려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근심이 많다.

지금도 유해가 묻힌 학살 장소는 방치돼 있다. 전국에 발굴되지 않은 학살 매장지도 많다. 신도시 개발로 사라진 곳이 수두룩하다. 배상은커녕, 억울한 영혼이라도 거둘 수 있을지 감감무소식이다. 이뿐인가. 무자비한 학살에 가담한 가해자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권력층으로 살고 있고, 많은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혀있다.

이 사건을 청산하는 길은 진상규명과 진정한 사과다. 또 추악한 학살자에 대해서는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이다. 영화 말미에, 한 할머니가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얘기하는 장면이 계속에서 눈에 밟힌다. 

“겁이 나요. 옛날 세상 돌아올까 싶어 겁이 나요. 아직까지 남북이 갈려서 안 있는 교. 겁이 나요.”

<레드툼>은 재미만으로 볼 수 없는 영화다. 이 영화는 보도연맹사건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들이나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배우게 한다. 또 스스로 ‘인간이란 무엇인지’ 물으면서 ‘인간의 슬픔이 다른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