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안 해본 여자. 이 여자가 안 해본 것은 단순히 연애가 아니다. 남녀가 (놓인 것 위에 또 놓인 상태로) 서로를 열심히 탐닉하는 잠자리, 섹스다. 그런데 이 여자, 까다롭다. 섹스 상대는 무조건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여야 한다. 괜찮은 배경이나 따뜻한 마음보다 중요한 것은 외모. 다시 말하면 수컷 냄새가 물씬 풍기는 남자, 성적 매력이 충만한 남자와의 근사한 하룻밤이다.
이 여자는 ‘많이 해본 여자’에게 남자 공략법을 묻는다. 옛날엔 첫날밤을 보낸 뒤 요대기에 벌건 게 나오지 않으면 소박을 맞았지만 이 여자의 순결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씨도 안 먹힐 얘기. 오히려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놀림을 당할 일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탄식이 저절로 새어 나와 가슴골이 근질근질해진다.
여자는 기회가 와도 섹스를 겁낸다. 남자도 무섭고, 혼전순결도 걱정된다. 겉으로는 청렴한 지식인이었지만 내면에는 음란마귀로 가득 찼던 아버지, 복상사로 절명했던 당신을 굳이 심장병으로 둔갑시켜야 했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란 세월은 여자를 숫처녀로 포박한다.
영화 ‘한 번도 안 해본 여자’는 두 여자의 은밀한 얘기를 다룬다. 여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욕망하는지 여과 없이 보여준다. 문제는 두 여자의 패턴이 극과 극이라는 사실. 한 명은 감정만 앞서는 숙맥이고, 또 한 명은 너무도 화끈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여자들이 보면 자신의 몸 어딘가에 맨살이 닿는 촉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눈빛들이 벌거벗은 몸을 훑어 내리는 기분이랄까.
베드신은 여느 영화와 다르지 않지만 여성의 시선에서 바라본 점은 사뭇 신선하다. 게다가 알맞게 붙은 남자의 ‘갑빠’와 미끈하게 빠진 여자의 ‘각선미’도 흥분을 더한다. 특히 야한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여자의 생식기 중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거리낌 없이 얘기하고, 두 여자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뒹굴고, 한 번도 안 해본 여자가 키스를 하고 싶어 환장하는 장면 등도 하나 같이 흥분되고 웃긴다.
아랫도리가 뜨거워진다. 자극적이고 노골적이다. 눈동자에서 스파크가 일고, 생식샘이 출렁인다. 이 영화를 온전하게 보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은 누구나 화끈한 잠자리를 꿈꾼다’는 전제에 동의해야 한다. ‘실제로 주위 사람들이 저렇게 섹스를 밝힐까’라는 고민도 접어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흔들리는 육체적, 심리적 파장을 극복하기 어렵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처럼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욕구로 섹스를 인정해야만 이 영화를 편안하게 볼 수 있다.
처음 만난 남녀가 첫 눈에 반해 나뒹구는 찌릿한 섹스를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 사랑을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섹스를 인간의 원천적인 그리움으로 생각하는 경우다. 그런 사람은 이 영화에 스멀스멀 동화된다. 또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예를 들면 이 영화에서 여자가 원하는 것은 원대한 사랑이지만 그 안에는 남자와 살을 맞댄 채 따뜻함을 나누고픈 욕구와 타오르는 쾌락의 욕정이 숨어 있다. 남자들은 전혀 몰랐던 여자의 일면이다.
이 영화는 가벼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연애로 풍자한다. 아니 뼈와 살이 타는 연애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투영한다. 아울러 농염한 연애사와 함께 교수 임용을 둘러싼 부정, 학벌지상주의의 예술계, 겉모습이 화려하고 섹시하면 창녀일 거라고 착각하는 남성 사회를 경고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껏 가볍고 관능적으로 무르익었지만 경박하고 얕은 로맨틱 코미디는 아니다.
연애는 잘해도 고민, 못해도 고민이 아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것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연애는 인간관계의 한 표현이지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 없다. 모든 인식에는 단 하나의 대상이나 가치를 가진 것이 있다. 자연이나 신과 같은 존재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인간성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충분히 즐기고 어울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인간관계 자체를 목표로 정의한다. 가장 큰 이유는 욕망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여러 군상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사랑 혹은 호의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뿌리에는 인간성을 마비시킨 욕망이 자리한다.
섹스는 그런 것 같다. 온전한 정신과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악마가 있거나, 사람이 지혜로운 심성을 잃거나, 마음이 온전치 않아서가 아니다. 그야말로 제 눈의 안경,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에 꽂히게 돼 있다. 사람마다 각각 좋아하는 색깔이 다르듯 성적 취향 또한 다르다. 단지 사람에게는 고독의 냄새가 있다. 이 냄새는 서로의 스타일과 약점, 관점 등이 작용해 스타일의 폭을 확장시킨다. 또 물질이나 명예, 사명, 존경심 등과 같은 요인도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수줍고 진지하다. 묘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뒤통수를 찌르는 청교도적인 통증도 깨끗하게 가라앉힌다. 일상이 답답하거나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아직도 살아있다면 이 영화 괜찮다.
이 영화는 양면적이다. 마음속에 찌든 욕망을 채우기도 했고, 덜어주기도 했다. 감독이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려고 노력했던 점은 아쉽기도 했고, 좋기도 했다. 육욕적이지만 정신은 살아 있고, 퇴폐적이지만 오버는 하지 않으며, 숨기지만 솔직하다. 어찌 됐든 로맨틱 코미디물을 보고 특별한 가르침을 기대하는 것은 금물. 일상의 파격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이 오히려 낫다. 느낌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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