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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 - 스스로 선택한 현실과 맞짱 뜨다, 이덕희 감독 2013년작

이동권 2022. 10. 10. 21:13

창수 , 이덕희 감독 2013년작


남자를 부르는 남자, 임창정. 의리와 인정이 넘친다. 성격은 호탕. 좀 살벌할 때도 있지만 속에 감추는 것 없이 싸지른다. 속이 다 후련하다. 퇴폐적이거나 노골적인 묘사도 에두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웃기고 정나미가 가는 건 이 남자가 가진 재주다. 

임창정이 영화 <창수>에서 박창수로 분했다. 동네에서 침 좀 뱉고 다니는 경박한 양아치 역할이다. 말투는 건방지고, 품행은 천박하다. 공중화장실에서는 자신의 전용 칸에서만 용변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데나 덤비며, 밤길 노상방뇨는 에티켓이다. 돈 버는 재주는 쌍스럽다. 징역살이 대행업자. 다른 사람이 저지른 죗값을 대신 치르고 돈을 버는 상식 이하의 밥줄이다. 삶의 모토는 가늘고 길게, 벽에 똥칠할 때까지 비겁하게 사는 것. 놈팡이도 그런 놈팡이가 없다. 

겉으로 보이는 풍미는 영 아니지만 마음에 드는 구석도 있다. 의리는 산 같고 죽음은 홍모 같다. 속마음은 순박하고 인정은 두텁다.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한 번 애정을 쏟은 사람에게는 모든 걸 다 준다. 의외로 까다로운 면도 있다. 여자가 옷 벗고 달려들어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몸도 안 가는 순정파다. 그래서 창수는 서른이 넘도록 한 번도 여자와 잠자리를 가져보지 않았다. 이상한 건, 창수는 살면서 별다른 불평은 없다. 자신을 바보라고 자책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초긍정’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캐스팅이 훌륭하다는 점. ‘인간미 넘치는 불량함’. 임창정이 아니면 제대로 살리기 어렵다. ‘지성미 넘치는 광폭함’은 안내상이 보여줬고, ‘천연미 넘치는 가벼움’은 정성화가 살려냈다. 

영화 <창수>에서 창수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정성화가 맡았다. 정성화는 창수의 후배로 등장해 창수를 어르고 놀리고 속인다. 창수가 어떤 인간인지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장치’다. 정성화는 이 영화에서 썩 괜찮은 연기로 영화의 흐름을 받쳐준다. 특급 뮤지컬 배우가 스크린에서 욕을 해대니 조금은 어색. 안내상의 연기도 물이 올랐다. 저열한 눈빛, 흔들림 없는 자세, 혐오스러운 미소로 스크린을 압도한다. 눈을 동그랗게 뜰 때마다 이마에 잡히는 주름. 관람객들을 완벽하게 휘어잡는다. 

 

 



창수는 살면서 한 번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본 적이 없다. 태어난 것도, 버림받은 것도, 살아가는 것 모두 타인의 의지였다. 성씨도 고아원 원장님의 성을 물려받았고, 돈벌이마저도 타인의 죄를 대신하며 산다. 그랬던 창수가 어느 날 담배를 꼬나물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주체적으로 살겠다고 공표한다. 가슴에 사랑을 품게 해준 여자, 미연 때문이다. 

미연은 예쁘다. 창수는 예쁜 여자에게 사족을 못 쓴다. 하지만 예뻐서 미연을 좋아한 것만은 아니다. 자신처럼 고아로 자란 것에 대한 동병상련이다. 그런데 이 여자, 보통이 아니다. ‘싸가지’ 밥 말아먹었다. 입만 열면 욕이고, 몇 마디 나누면 무시다. 하지만 부끄럽고, 치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다. 여자는 지존파 두목의 애첩이다. 조직 넘버 2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가 관계가 틀어진 것도, 학교(감옥)에 간 두목을 배신할 수 없어서다. 이 영화의 재미는 여기부터다. 미연이 죽임을 당하고 창수가 누명을 쓰면서 처절하고 악스러운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 영화를 보면 산다는 게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낀다. 젊을 때 누구나 겪는 방황이나 좌절, 갖은 고생과는 양상이 다르다. 창수는 꾸역꾸역 살아간다. 대답 없는 현실에서 위로 따위는 필요 없다. 그런 위로가 오히려 사는 데 방해가 된다. 불평과 불만은 거추장스럽다. 친한 후배의 배신에도 웃음을 질질 짜낸다. 나 같은 놈, 손가락 부서지고 좀 못 걸어다니면 어떠하냐는 식이다. 

자신을 철저하게 놓아버린 삶은 기묘하게도 희망으로 전이된다. 지독한 현실, 밑바닥 삶을 ‘그까짓 것 사는 게 다 그렇지’라고 변용하는 창수의 언행 때문이다. 창수는 어떠한 시련에도 웃음을, 목표를 잃지 않는다. 혹독한 고문과 처절한 능욕 앞에서 옷을 입은 채 오줌을 싸지만 돌아서면 욕하고 웃어버린다. 아마도 그건 창수가 주체적으로 결정한 삶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피비린내 나는 전장마저도. 

단, 이 영화는 감동적은 측면에서는 조금 미달이다. 플롯은 정공법이다. 미리 예상한 ‘반지’ 퍼포먼스가 그대로 말미에 등장한다. 저절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저절로 감동을 유발하기보다는 다소 인위적이다. 칼 맞은 남자가 어떻게? 이 영화는 생각하면서 보지 않으면 상황에 휘말려 밋밋하게 채점할 소지가 있다. 반대로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길고도 험한 인생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 힌트를 얻는다. 자신이 아닌 것을 버리고,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은 어떤 시련과 상처도 금방 아물게 하고, 죽음 앞에서도 완연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들. 열정적으로, 주체적으로 삶을 설계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창수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인생은 아름답다. 인생의 방향과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어떻게 현실을 대하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