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류지선 화가, 전주교대 교수 - 앞으로의 과제는 '어떻게'

이동권 2022. 10. 10. 21:37

류지선 화가, 전주교대 교수


새로운 생명은 과거의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간다. 과거의 토대 없이 현재와 미래가 있지 않다. 과거를 잃어버리는 순간, 아예 새것이 되거나 자신을 속여야 산다. 삶도 그렇다. 살면서 자신을 발견해가고, 최선의 것이 되기 위해 변화하는 과정, 그 싸움이 삶이다. 류지선 작가도 더욱 멋진 하나의 상을 위해 연방 전이 중이다. 

류 작가는 매번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변했다. <정육점>, <사이비동물원>, <포스트 파라다이스>, <개(改)집> 등 그림만 보면 이어지지 않을 계보를 따라,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닌 것 같은 다양한 화력을 펼쳐 왔다. 그림에 대한 자신만의 고집이나 성찰이 아니라면 힘들다. 또 그림에서는 완성한 듯, 완성하지 않는 듯 붓을 놓아버리는 시원한 면도 읽히고, 마무리가 의문이 드는 그림, 주제에만 천착한 그림도 보인다. 그에게 뭔가 의도가 있다.

자신이 사는 일에는 크게 관심을 쓰지 않는 마음. 그는 그 마음이 움직이는 바를 그대로 충실히 그려내 왔던 것 같다. 돈이 되는 그림보다는 작가로서의 양심에 따랐고,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다양한 형식과 작풍을 실험했다. 이제 그는 그것을 발판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 중이다. 원숙의 단계로 나아가려는 고민. 나와 너만 만족하고 이야기하는 그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많은 사람들이 탐하고 싶을 만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통의 고민. 그를 만난 단상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어떻게’다. 뜬구름을 잡는 것,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공간에서 소통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작품들은 사람들의 미감을 건드리는 쪽으로 발전했다. 다른 사람이 내 그림을 봤을 때 감정을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홍보도 잘해야 하는데, 내 작품을 내가 홍보하는 것이 쉽지 않더라. 민망함도 있고(웃음).”

전시 <개(改)집>전을 보면 미적인 면과 동시에 내용에도 균형 있는 시각을 유지했다. 과거와 달리 사람들과 더 많이 소통하길 바라는 그의 고민이 느껴지는 전시다. 응고된 정신과 육체는 창조와의 완전한 접촉을 방해한다. 속박된 것은 언젠가 고여 썩고 쇠퇴해 죽음을 맞이하게 돼 있다. 그는 움직이고 있다. 변화를 채찍질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살아있다. 그의 차기작들이 기대되는 이유다. 

류지선 작가가 그림을 시작한 이유는 여느 화가들과 다르지 않다. 관심과 재능이 합쳐져 자연스럽게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대부분 부모님들은 그림을 하면 ‘배고프다’고 반대한다. 하지만 류 작가는 자신의 의지대로 그림을 그렸고 화가가 됐다. 그는 대학에 다니면서 현실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엄혹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림에도 그런 관심은 그대로 반영됐다. 그가 대학 졸업 후 내놓은 첫 작품의 배경이 울산이 된 건 어쩌면 당연했다. 물론 울산 공단지역에서 나고 자랐던 영향도 있었다. 

“도시가 삭막했다. 거대한 기계, 회색의 공장벽. 서울에 올라오면서 문화충격을 받았다. 울산에서 자랄 때는 몰랐는데 서울에 오니까 더욱 노동현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첫 작업에서 울산의 굴뚝, 작업복 같은 것을 그렸다. 이때는 내 표현이 강했다. 자의식적인 그림, 예술의 사회적 책무나 의무감도 많았다. 마르크스주의에 짓눌려 있었다. 이후 <정육점>, <사이비동물원>, <포스트 파라다이스> 전시까지도 미학적인 것보다는 내용을 더욱 강조했다.”  

류 작가의 <사이비 동물원>전은 스토리텔링이 있는 전시다. 그는 오브제와 설치 작업으로 실제 동물원처럼 전시장을 꾸몄다. 전시장 입구의 철창을 지나면 동물이 나오고, 지우개 가루로 가짜 짐승의 털을 표현하는 식이다. 오프닝 행사 때는 음식으로 바나나를 내놓을 정도였다. 

그림은 작가의 무엇과도 분리될 수 없다. 자신의 관념이나 사상, 넓게는 생활의 태도까지 그대로 담긴 거울이다. 작가의 내부에 있는 마음의 조각들, 살아오면서 겪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대로 작품에 반영된다. 그 당시 그의 작품들은 화사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시대와 현실, 사회에 대한 발언 욕구, 작품의 미학적 성취보다는 자신의 시각과 생각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 까닭이 가장 클 것이다.  

<포스트 파라다이스>전 같은 경우도 표현방법은 다르지만 전작들과 일맥상통한다. 류 작가는 이 전시에서 거대 사과나무에 포도가 열리는 작품을 선보였다. 조각과 회화가 하나로 되는 시도, 겉으로 보기에는 멋있는 파라다이스지만 식물의 이미지는 흉측한 ‘아이러니’다. “DNA가 조작된 식물, 유전자가 조작된 수입곡류로 인간과 사회의 욕망을 표현했다.”  

류지선 작가의 전시 <개(改)집>전은 과거와 조금 달라졌다. 배경색도 화려하고 표현도 유머러스하다. 비정한 자본주의를 까발리는 방법이 유해 졌다고나 할까. 류 작가는 개집을 통해 우리 사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머리를 썼다. 영특하다. <개집>은 집을 고친다(改)는 의미와 개가 사는 집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개집>전은 집 얘기다. 좋은 집이나 좋지 않은 집이나 사람이 사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더 좋은 집을 차지하기 위해 집착한다. 커다란 집에서 대가족이 함께 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과 집을 공유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자기만 호위 호식하면서 자기가 가진 부를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한쪽에서는 100평짜리 집도 성에 차지 않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월세조차 구하지 못하고 거리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류 작가는 개집을 고쳐 그려 나갔다. 중세시대의 건물부터 현대의 최신식 집까지 수려한 형태로 개집을 개조했다. 하지만 고쳐도 개집은 개집일 뿐이다. 이 개집은 시장의 메커니즘을 떠오르게 한다. 작가가 표현하려고 했던 집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값을 매기고 소유하며, 그것을 통해 권력을 쥐려는 사회가 투영된다. 또 이 개집은 욕망 때문에 황폐해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대변한다. 승자독식, 무한경쟁, 1%대 99%가 만연한 사회가 개집 하나로 완벽하게 요리됐다. 

“우리나라에서 집은 단순한 거주의 의미가 아니다. 사는 공간의 의미를 넘어 사회계층의 정체성까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욕망이다. 집에 대한 과도한 욕망. 개집을 고쳐봤다. 개집을 실제로 고치면 어떻게 될까. 개집은 고쳐도 개집이다. 개집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개집>전은 과시욕의 대상인 집을 희화화해 관람객들에게 페이소스를 줄 것이다.” 

하지만 집은 모든 사람이 욕망하는 대상이다. 성직자가 아니라면 매우 보편적인 정서다. 그만큼 ‘정도’와 ‘정의’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지나치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친다. 집에 대한 욕망은 작가들에게도 자유롭지 못하다. 성철스님은 무소유는 이래저래 얽매일 것이 없어 어리석음과 괴로움에 빠지지 않게 한다고 말했다. 자유로운 사유와 창작이 필요한 작가에게도 어느 정도 필요한 소양이다. 하지만 작업할 공간마저 없는 현실은 오히려 창작의 의지를 옥죈다. 

“작업실을 마련하면서 집 문제를 실감했다. 작가들은 집에 대한 욕망이 크다.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없다. 작업실을 얻어놓고 계약이 끝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유목생활을 한다. 공간에 대한 욕망에서 나조차도 자유롭지 않다.” 

우리 사회는 겉모습을 보여주는데 도취돼 있다. 실제로 사는 것도,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닌데 겉모양이 그렇게 중요한 시대다. 하지만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겉모양이 아니다. 은은하게 흐르는 저 강물이 실제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고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 강물에 수많은 물고기가 움직이고, 수풀이 자라며, 갖가지 사연을 가진 인간들이 찾아와 마음의 평온과 위로를 얻는다. 가지지 않았으나 더 많이 가진 것. 예술도 그런 것 같다. 꼭 소유하지 않아도 더 많은 것을 지닌 것. 류지선 작가의 고민도 거기에 닿아 있으리라. 류 작가의 <개집>전을 보면서 드는 고마운 감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