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그래 그 영화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 - 그의 자살을 이해할 수 없다, 마르잔 사트라피, 빈센트 파로노드 감독 2013년작

이동권 2022. 10. 7. 21:55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Poulet aux prunes), 마르잔 사트라피(Marjane Satrapi) 빈센트 파로노드(Vincent Paronnaud) 감독 2013년작

 

바이올리니스트 나세르 알리 칸이 자살하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바이올린을 에로스와 일체화하고, 이에 따른 상실감을 죽음으로 끌어내는 그에게 좀 짜증이 났다. 죽음이 그렇게도 간단하고 쉬운 문제인가. 감독이 의도하는 바는 알겠다. 삶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삶은 너무도 가볍고 약했다. 강한 삶은 자기 스스로 삶을 선택한다. 누군가에 의해 끌려 다니지 않는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첫사랑에 삶을 저당 잡히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조건을 보고 결혼을 하고, 그런 다음에 사랑의 대상이 부서졌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삶을 내려놓겠다는 것. 그것은 예술가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가 약한 사람이기에 그런 것이다.

이 영화는 그의 약함을 끌어내야 했다. 얼마나 자신이 변변치 못하고 한심한 사람인지 깨달아야 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예술가라는 위치로 모든 약함을 합리화시켜버렸다. 그와 결혼한 아내는 무슨 죄인가. 그의 죽음보다 자두치킨을 만드는 아내의 마음이 더 가슴을 여미게 만든다. 이 영화는 대사도 재밌고,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애니메이션도 신선하다. 또 음악도 좋고, 배우들의 연기도 뜻밖이다. 게다가 영화로서 감칠맛도 있고, 상상력도 풍요롭다. 정말 영화로서는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얼토당토않은 죽음을 얘기하면서 내용 면에서는 과잉이 돼버렸다. 요즘 안타까운 죽음을 많이 목도하면서 생긴 편견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문화적인 차이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잉은 과잉이다. 깊게 들여다보지 말고 가볍게 보면 좋은 영화다.

프로이트는 삶의 본능을 에로스(Eros)로 봤다. 반대로 죽음의 본능을 타나토스(Thanatos)라고 했다. 에로스는 생명을 유지시키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게 만든다. 하지만 타나토스는 파괴한다. 자신을 파괴하고 타인과 환경을 처참하게 유린한다. 이 두 가지 본능이 서로 중화돼 인간의 삶은 이어진다. 영화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은 타나토스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지 보여준다. 감성이 풍부한 예술가를 통해 더욱 극명하게 표현해낸다. 에로스가 사라진 주인공을 잠식시키는 타나토스의 과잉. 아마도 거기에서 작가는 죽음을 유추해낸 듯싶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쉬워질 텐데, 그래도 과잉은 과잉이다. 프로이트 헌정 영화가 아니라면.

인간은 죽음을 떠올리거나 거기에 가까이 이를 때 삶을 읽어 내려가듯 깊은 명상에 젖는다.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살다가 커다란 벽에 부딪치는 순간 찾아오는 성찰이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과 마주한 채 적나라하게 자신을 파헤치는 동안 고독과 슬픔을 겪는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도 엄습한다. 이런 시간을 통해 영혼은 아름답게 채워지고 삶은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변한다.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하는 동안 회상에 젖는다. 하지만 통렬한 자기반성은 없다. 왜 삶이 이런 지, 사랑이 없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만 일러줄 뿐이다. 그런데다 그의 마지막 죽음 또한 자살이다.

자살. 인간은 짐승과 다르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더 이상 물러설 때가 없을 때 선택하는 자살은 자연사와 동등하다. 벼랑 끝에 몰린 삶에 절망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거나 숨 막히는 고통과 종지부를 찍기 위해 단호하게 목숨을 포기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사랑이 없다고, 의욕이 없다고, 욕망이 없다고, 즐거움이 없다고 자살하는 것은 그야말로 부질없다. 운명적으로, 종교적으로, 아니면 교육을 통해 자살을 금기시했던 사람이 현실을 파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현실적으로 거의 희박하다.

사람들이 이런 문제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성찰이 부족해서다. 자신의 삶을 뼈저리게 성찰해보면 그것의 원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찰 없이 무한한 슬픔에 몸을 맡긴 채 선택하는 자살은 옳지 않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참혹한 것은 이놈의 세상은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욕할 줄은 알아도 사람의 죽음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가난과 폭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버리거나 세상에 작은 씨앗을 뿌리고자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시선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영화에 나오는 예술가가 더 짜증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바이올리니스트 나세르 알리 칸


영화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의 주인공 바이올리니스트 나세르 알리 칸. 그의 바이올린을 교사로 일하는 아내가 부순다. 이유는 단순하다. 남편이 돈을 못 벌어와서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 미운 것이다. 바이올린이 부서진 뒤 그는 다시 자신에게 맞는 바이올린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찾지 못한다. 결국 그는 삶을 마감할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는 침대에 누워서 어떻게 죽고, 어떤 말을 남길지 고민하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그를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은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아내는 그를 위해 자두치킨을 준비한다. 식욕으로 삶을 의욕을 되찾아 주려고 한다. 또 외모까지 변화를 준다. 하지만 그는 그런 아내가 더 지겹다. 따귀를 올려 쳐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짜증 나는 표정으로 아내에게 함부로 말한다. 

 

영화는 그가 사랑했던 여자 ‘이란’으로 넘어간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지만 이란의 아버지가 반대하자 이란은 떠난다. 그는 실연의 아픔과 이란에 대한 그리움을 바이올린 선율에 담아내고, 바이올린에 그의 예술과 사랑은 전이된다. 그에게 바이올린은 사랑과 예술 그 자체가 돼버린다. 그래서 그는 바이올린이 부서지자 죽음을 선택하게 된 다.

이 영화는 제68회 베니스영화제와 제36회 토론토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으며, 제10회 더블린영화제에서 특별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