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사이로 빛이 쏟아진다. 무성하게 우거진 정원은 한없이 감미롭고 따뜻하다. 힙힙 호레이(Hip Hip Hurrah!)를 외치는 사람들의 표정은 환상적이다. 덩달아 마음이 들뜨고 설렐 정도로 즐겁고 재밌는 그림이다. 화가 패데르 세베린 크뢰이어 (Peder Severin Kroyer)가 그린 ‘스카겐 파티’다. 이 명화가 영화에 그대로 재현된다. 세베린은 유럽을 대표하는 자연주의 화가이자 덴마크 최고의 ‘빛의 화가’다.
‘마리 크뢰이어’는 화가 ‘패데르 세베린 크뢰이어’의 아내다. 영화의 제목은 ‘마리 크뢰이어’지만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이유는 세베린 때문이었다. 그의 삶과 예술세계, 특히 수많은 명작들이 어떻게 탄생됐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제목처럼 마리 크뢰이어의 삶을 조명한다. 안락한 삶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뒤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마리의 삶을 잔잔하게 그린다. 세베린이 궁금해 영화관을 찾는다면 다소 실망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마리 크뢰이어의 이야기라는 것을 명심하고 보자.
마리는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크뢰이어의 그림 속에 마리가 자주 나오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아름다운 여인과 찬란한 빛은 굉장히 잘 어울리는 궁합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세베린의 작품에 나오는 마리의 모습을 판에 박은 듯 재현한다. 이를 테면 꽃이 만발한 정원에 마리 크뢰이어가 앉아 있다. 이 장면은 ‘Roser. Marie I Haven’이라는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19세기 유럽에 사는 여자들의 운명은 남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마리 또한 남편을 따르고 복종하며 뒷바라지를 했고 사랑했다. 하지만 신경은 늘 곤두서 있다. 남편의 정신병 때문이다. 세베린은 한 순간에 집착, 광기, 폭력에 지배되곤 했다. 사랑하는 아내 마리와 딸의 생명까지 위협할 정도로 괴팍해졌다. 마리는 하루하루 괴로운 나날을 보내다 휴가차 들른 스웨덴에서 젊은 음악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사랑을 찾아 떠나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시련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마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쓸쓸히 기차를 타고 사라진다. 이때 마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이들의 행복을 기원하며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었다. 이 장면은 어떻게 삶을 살아야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보면 마리는 불행해졌다. 하지만 그는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했다. 그때부터 인생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자신의 선택이었기에 후회도 절망도 없었다. 오롯이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었고, 자신으로부터 삶의 위로를 얻었다.
마리가 이혼을 고민할 때 생각했던 것은 아마도 죽음이었을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보다 깊고 섬세한 것으로 채워준다. 삶에는 연습이 없다. 사랑하는 것도, 한없이 성숙해지는 것도 모두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마리는 사랑 때문에 가족을 버렸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남편과 어린 딸에게 크나큰 상처를 줬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어쩌면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은 행복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여성스럽다. 거장 빌 어거스트 감독은 마리의 감정 하나까지도 섬세하게 잡아냈다. 별다르게 감동적인 대사도 없고, 특별한 장면도 없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배우들의 표정과 눈빛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숨이 멈출 것 같은 절망에도 냉정하게 표정을 관리하는 마리의 눈빛 연기는 최절정이다.
화가 세베린은 아내 마리와 함께 스카겐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정원과 바닷가 풍경, 사람들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스카겐에는 많은 화가들이 세베린의 명성을 쫓아 몰려들었고, 그를 중심으로 스카겐 화파가 만들어졌다. 그는 40대 들어서면서 시력이 점점 나빠졌고, 말년에는 거의 시력을 잃다시피 했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또 성품이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자 남은 한쪽 눈이 더 잘 보인다고 상대방을 즐겁게 해줄 정도였다. 이러한 성품은 작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그림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포근하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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