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고독과 향수에 젖은 삶에서 완전히 떠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작별할 수도 없고,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순수한 방랑자가 될 수도 없다. 그렇게 미련과 집착을 오가며 사는 게 사람이다. 삶을 조금이라도 사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를 얻기 위한 삶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드물다. 평화는 진정으로 행복을 말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 자기애에서 벗어나 타인을 볼 수 있을 때, 협소한 가족의 의미에서 벗어나 그 이상의 테두리에서 가치를 발견할 때, 진정한 위로가 다가오며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번민도 잠재워진다. 쉽게 얘기하면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처럼 삶을 나누면 평화도, 웃음도 휴식처럼 찾아온다. 그것을 연극 ‘칼잡이’는 힘주어 말한다.
칼잡이는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연극이다. 입장료도 저렴함 편인 데다 재미, 감동까지 삼박자를 모두 갖췄다. 이 연극이 던지는 메시지 또한 현실적이고 부담스럽지 않다. 달콤하고 강렬한 향은 없지만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라 공감대가 크다. 이기적인 현대인들의 자기애부터 재래시장을 죽이는 대형마트, 취업하지 못한 청년들의 애환, 가치관의 차이를 극복해가는 세대 간의 화해까지 모두 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내용이다. 특히 젊음의 향기로 넘쳐 겸손함을 모르는 사람들, 자기만 알고 타인의 아픔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늘 위만 보고 갈구하며 주위를 무시하는 사람들, 적당히 대충 살면서 요령만 피우는 사람들, 자기 것과 자기 가족에만 매몰돼 있는 사람들에게 이 연극은 잔잔한 가르침을 줄 것이다.
늙은 칼잡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실천해가는 일상은 지혜로 가득하다. 무뚝뚝하고 냉정해보지만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그에게 어느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칼잡이는 삶의 고통을 모른 채 잘해달라고만 닦달하는 딸에게, 남들은 그만 챙기고 가족들 좀 챙기라고 윽박지르는 아내에게 냉정하다. 이 정도면 살만하다는 호통이다.
대신 가난한 이웃에게 삶의 고통을 겪은 젊은이들에게 삶의 터전을 열어준다. 칼잡이가 되겠다고 들어온 젊은이에게 칼을 다루는 기술을 가르쳐서 횟집을 물려주고 떠나는 식이다. 칼잡이는 젊은 시절 세상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살인미수로 잡혀갈 수 있는 그를 도리어 도와준 스승이 있었다. 그는 그때의 감사를 잊지 않고 삶에 새 살을 채우는 삶을 실천했다.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여 깊은 사랑을 실천했다.
칼잡이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인생을 모르는 정열은 ‘욕망’이라고 말한다. 세상을 관망하고, 이웃을 살피고, 불의에 맞서고, 삶에서 생기는 갖가지 상처를 사랑과 헌신으로 변용시킬 줄 알아야 그것이 참된 용기이자, 아름다운 삶의 열정이라고 보여준다.
살면서 부담스럽지 않게 감동을 주는 연극은 매우 오랜만이다. 눈동자를 홀리지도, 큰 웃음을 주지도, 신묘한 흥분을 주지는 않았지만 가슴에 잔잔하게 파동을 일으키는 이 감동은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또 극이 끝난 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연극, 혼탁한 세상사에 이렇게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행복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은 ‘발발이의 추억’, ‘돈아 돈아 돈아’로 유명한 강철수 작가가 20여 년 만에 선보이는 연극이다. 이 작품은 2012년 제2회 자랑스러운 한국인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무대는 ‘염쟁이 유씨’와 ‘늙은 부부 이야기’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위성신 연출가가 맡았다. 이 연극을 보기 전에 얼마나 기대를 갖고 봤을지 짐작이 갔을 것이다.
기대는 예상대로 ‘만족’이었다. 구김 없는 미소와 강단 있는 세계관으로 관객들을 압도한 칼잡이. 바람이 불어오는 넓은 숲길을 걷는 것처럼 따뜻한 위로와 위안을 선사해줬다. 또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올라와 있는 배우들의 연기와 춤, 음악, 큰 무대를 꽉 채우는 동선, 작은 부분 하나까지 섬세함을 놓치지 않는 연출에서 혼신의 노력을 엿보았다. 저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박수가 나왔다.
사정도 어렵고 아옹다옹이지만 서로 도와가며 사는 재래시장 사람들과 커피 파는 리어카 아줌마, 오토바이 배달원, 깡패들 등 여러 조연들의 연기도 빛났다. 춤과 노래로 제 손발이듯 다루는 솜씨가 아무나 배우를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좀 더 외향적인 성격이었다면 더 환호해줬을 텐데, 그것이 좀 아쉽다.
강철수 작가는 이 연극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많은 이들이 고생을 모르고 자란 세대들이 그릇된 가치관으로 시대 탓만 한다고 개탄하고, 그러한 젊은이를 꾸짖어 바른 길로 이끄는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고 어른들이 탄식한다. 그러나 세상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상을 받을 만한 어른이 있다. 음지에서 묵묵히 내공을 쌓으며 열정을 불태우는 젊은이도 많다. 이 연극은 그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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