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객석과 무대

[연극] 필로우맨(Pillowman) - 병적인 관음증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동권 2022. 9. 29. 19:54

연극 필로우맨


건조하다. 쉽고도 어렵다. 난해하지만 공감이 간다. 내러티브의 힘이 느껴진다. 배우들의 연기력, 호흡, 몽환적인 애니메이션, 날 선 스토리라인. 일정 이상의 격조를 갖췄다. 하지만 긴장감은 좀 딸린다. 흡인력은 있지만 유쾌하지는 않다. 대사로 극을 끌어나간 까닭이다. 감동은 대사가 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이 준다. 따라서 충격은 있지만 감동은 부족했다.

곰곰이 생각했다. ‘이 연극은 개인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발휘되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린다.’ ‘아마도 지식인이라면, 꽤 흥미를 가질만한 연극이다.’ ‘정극을 선호하는 관객이라면 언제든지 별 5개를 줄 것이다.’ 정말 혀가 바짝 타들어간다.

필로우맨(Pillowman)은 마틴 맥도너(Martin McDonagh) 2003년 희곡이다. 이 작품은 진지하고 무겁다. 소재 자체가 아동학대와 연쇄살인인 데다 감춰진 세상과 실종된 인간성, 권력의 폭력성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주인공 카투리안이 하얀 공책에 써 내려간 핏빛 같은 잉크, 그 속에 섞인 분노의 목소리는 그래서 섬세하고 잔혹할 수밖에 없다.

이 연극은 심각하게 처절하다. 죽음 앞에 덩그러니 놓인 소설과 그것이 불태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 카투리안. 공권력과 살인범이 취조실에서 벌이는 이 가망 없는 싸움은 관객들에게 철저한 비애를 선사한다. 

주인공이 죽은 뒤 소설은 불태워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읽지 않도록 봉합된 채 50년 동안 창고에 보관된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지만 산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하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이 연극을 쓴 작가 ‘마틴 맥도너’에게서 앨버트 카뮈의 이방인이 보인다.

스토리는 아이들을 죽인 범인을 취조하는 추리형식의 심리극이다. 배우들의 대화와 행동은 인간의 저속함과 예술적 허상을 보여주는데 일관한다. 삶의 의미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건 카투리안은 세상의 이방인이었고, 그의 삶에는 그 어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받았던 형을 구한 건 바로 어린 카투리안이었고, 아이들을 유괴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형을 벌한 것도 카투리안이었다.

특히 스토리텔러로 등장한 카투리안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는 죽음의 메타포는 가히 충격적이다. 주인공 카투리안이 쓴 소설은 사실이면서 사실이 아니고, 사실이 아니면서 사실이다. 그는 살인자면서 살인자가 아니고, 그의 형은 살인자지만 정신지체자이면서 매우 영특하다.

일종의 조롱 혹은 기만 같다. 이 연극은 모든 게 조롱이고 기만이다. 실상 이 연극에서 누가 살인을 했고, 어떻게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실종된 세 번째 아이의 행방도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권력의 속성이다. 필로우맨은 역사에 대한 정직한 책임과 힘 있는 용기가 부재한 현실을 빗대어 관객들을 기만하고, 권력을 비웃는다. 아이들을 죽이면서.

그럼 무엇이 진실일까?

딱 한 가지는 정확하게 진실이다. 이 연극을 보고 있는 관객이 스스로 성찰하면서 느끼게 되는 공포. 그것이 바로 진실이다. 아동학대로 빚어진 트라우마와 참혹한 살인은 이야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감정이입. 관객들은 연극을 보는 내내 취조를 받고 처형을 당하는 카투리안을 보면서 동화돼버린다.

카투리안의 죽음은 관객들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자신 이외의 것에 얼마나 관대했고, 당신의 삶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얼마나 조심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고 살아왔으며, 이 나라의 권력은 정치적이고 폭력적인 것들에 얼마나 위선적이었던가. 카투리안의 주검을 내리쪼이는 조명을 올려다보니 마음이 아파온다.

오해를 무릅쓰고 얘기하지만 카투리안의 역에 김준원을 캐스팅한 것에 적극 동감한다. 전적으로 수긍한다. 카투리안은 그로테스크한 소설을 쓰는 작가지만 다재다능한 ‘감’이 없는 배우가 맡기에는 부담스러운 역할이다. 어마어마한 대사량과 감정변화, 노려한 표정연기. 아무나 못한다. 냉정한 수사반장 ‘투폴스키’ 역을 맡은 손종학은 어떠한가. 그리고 카투리안이 쓴 소설을 읽고 듣기를 좋아하는 ‘마이클’ 이현철과 다혈질 형사 ‘에리얼’로 분한 조운은 또 어떠한가. 기가 막힌 캐스팅이다.

필로우 맨을 재밌게 보기 위해서는 ‘병적인 관음증’이 필요하다. 창문 너머로 몰래 엿보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바라보면서 형벌을 가하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부조리한 사회(에리얼)와 기만적인 권력(투폴스키), 행동하지 않는 양심(카투리안)과 자기 안에 갇힌 혁명가(마이클)이 핏발을 세우고 대사를 받아치며 싸우는 가운데에서 무기력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의식과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포르노처럼 까발려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그저 그렇고 그렇게 헝클어져 떠다니는 존재가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