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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왕 랄프 - 우리 시대 ‘거름’과 같은 이들을 위한 예찬, 리치 무어 감독 2012년작

이동권 2022. 10. 3. 19:07

주먹왕 랄프(Wreck-It Ralph) - 리치 무어(Rich Moore) 감독 2012년작


‘Fix It Felix JR(수리왕 펠릭스)’. 주먹왕 ‘랄프’가 사는 8비트 게임기다. 랄프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이다. 하루 종일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건물을 수리하는 펠릭스에게 벽돌을 던져 훼방을 놓는다. 하지만 랄프는 ‘나쁜 놈’이 아니다. 건물을 부수는 건 랄프의 직업이다. 그럼에도 주위 동료들은 랄프를 무시했다. 악당이라는 이유로 게임 30주년 파티에도 초대하지 않았다.

랄프는 외로웠다. 태어나서 30년 동안 던지고 부수는 악역만 해왔다. 랄프는 이제 인정도 받고 싶고, 착한 역할도 해보고 싶었다. 나아가서는 영웅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랄프는 ‘수리왕 펠릭스’에서 뛰쳐나와 슈팅게임 ‘히어로즈 듀티’를 거쳐 레이싱 게임 ‘슈가러시’로 들어갔다. 메달을 얻기 위해서다.

메달은 승자, 영웅, 착한 캐릭터에게만 주어지는 선물. 나중에 슈가러시에서 만난 왕따 ‘바넬로피’도 이 메달에 집착하는데 이유는 다르지 않다. 주류에 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사실 랄프도 딱히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주류로 인정받기 위해 메달이 필요했다.

애석하게도 랄프가 없어진 뒤 ‘수리왕 펠릭스’ 게임기에는 고장 딱지가 붙었고, 30년 동안 버텨온 오락실에서 퇴출 위기에 몰렸다. 욕이란 욕은 다 먹은 악당이지만 랄프가 사라지자 ‘수리왕 펠릭스’ 게임기는 고물로 전락해버렸다. 랄프도 여러 모험 끝에 메달을 얻어 펜트하우스에 입성하지만 모든 게 먹먹했다. 그토록 원했던 자신의 소망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그제야 깨닫게 된다.

 

 

주먹왕 랄프


랄프의 모험은 우리 사회의 얘기다. 어느 누구 하나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똑바로 굴러가지 않는다. 드라마에서도 나쁜 놈이 있어야 착한 놈도 있다. 누군가는 악당이 돼야 드라마도 재밌다. ‘수리왕 펠릭스’도 악당 랄프가 없으면 영웅 펠릭스도 없고, 게임을 즐기는 사람도 없다.

이 영화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버린 랄프를 반추하며 우리들에게 ‘책임감’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운다. 참으로 기발한 설정이다. 게임안의 세계를 빌려 현실을 드러내는 주제의식은 희화 이상의 위트와 해학으로 넘친다.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는 방법도 설득력이 있다. 게임기 안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충분히 개연성 있다. 예를 들면 랄프가 다른 게임으로 이동할 때 멀티탭을 ‘게임 환승센터’로 변경해 이동하는 식이다. 게다가 3D효과도 멋지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코드도 잘 빠졌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매우 특색 있다. 특히 오류가 난 게임 캐릭터 ‘바넬로피’는 다른 게임 캐릭터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는데, 랄프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바넬로피에게 힘을 주면서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 노동자들도, 소수자들도 이런 마음으로 뭉치면 못할 게 없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하루하루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인심은 날로 사납게 변해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의 짐도 무거워지고, 우리가 짊어져야할 책임도 더욱 커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용기’와 ‘의지’를 잃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이 할 일을 열어 나간다면 험난하기만 한 인생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때론 나 자신이 못마땅하고, 때론 나 자신이 하찮고, 때론 나 자신이 욕망에 가득 차 있더라도 스스로 성찰하고 용서해 나간다면 웃으면서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주먹왕 랄프는 악역이지만 ‘수리왕 펠릭스’ 게임에서 그만큼 중요한 이는 없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다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세상은 참 차갑고 인간은 참 못됐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