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그래 그 영화

라잇 온 미, 우린 똑같은 사람이었어, 아이라 잭스 감독 2012년작

이동권 2022. 10. 3. 17:48

라잇 온 미(Keep the Lights On), 아이라 잭스(Ira Sachs) 감독 2012년작


두 남자가 10년 동안 만났다. 첫 만남은 폰 미팅. 서로 사이즈(외모와 체형)를 묻고 답하다 이름도 묻지 않고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 뒤 헤어진다. 한 번 스치고 지나갈 것 같은 만남은 긴 만남으로 이어지고, 두 사람의 관계는 깊어진다.

 

두 남자는 섹스가 없으면 두 사람은 이미 헤어지고도 남을 만큼 다르다. 질투도, 분노도 섹스로 이겨내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해간다. 그러나 이러한 강박적인 만남은 미움과 실망의 크기만 점점 키울 뿐. 이들은 사랑은 의무가 아니며, 함께 살아봐야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이들은 마음으로 사랑을 고하고 웃으며 돌아선다.

두 남자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독자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두 남자가 벌거벗은 채 뒤엉킨 모습을 보고 노골적으로 ‘싫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아이라 잭스’ 감독의 자전적 영화이기에 ‘기우’를 물리친다. 마음에 와닿지 않을지언정 타인의 삶을 욕할 권리는 없다. 이 영화는 한 인간의 삶이자 팩트를 기반으로 만든 작품이다.

진보적인 감성이 없다는 것은 세상을 살면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두 남자가 벌거벗은 채로 만났다. 둘만의 공간에서 세상을 버리고 나체가 됐다. 그것은 벌거벗음, 섹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살과 살이 맞대는 따뜻함,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금지의 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는 마음으로 마주 보는 과정. 그들이 서로 사랑을 하는 한, 그것은 변태들이나 하는 짓이 아니었다.


헤어지는 에릭과 폴


폴은 변호사다. 단정하게 옷을 입고, 반듯하게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자다. 어둡고 차가운 현실과 맞서며 살아왔지만 한계에 부딪친다. 그가 찾은 비상구는 마약이었다.

반면 에릭은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자유스럽고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머뭇거림이 없다. 그는 욕망이 정신을 갉아먹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늘 마음의 중심을 잡고, 긍정적으로 해결하려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리 사회의 눈높이에서 보면 서로 맞지 않다. 다큐멘터리 감독과 변호사. 환경적인 격차가 너무 크다. 성격도 너무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연인이 된다. 이들의 만남이 가능한 이유는 남자와 남자였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은 사회적 조건보다 사랑을 중시하는 면에서, 적어도 이성애자들보다 속물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폴은 마약중독자다. 이기적인 면도 있고, 감정도 잘 다스리지 못한다. 에릭은 그를 지켜보면서 가슴이 무너진다. 또 그를 지켜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으면서 참고, 기다린다. 틈틈이 상처를 주는 폴을 그냥 떠나가면 그만이었지만 곁에 머문다. 그것은 사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동성애자다. 그것이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는데 충분했고, 그것에 대한 연민은 상상 이상의 힘을 갖게 했다.

에릭에게 폴은 가장 아끼는 사람이었지만 어느 순간 연민의 대상이 돼버린다. 그리고 에릭은 그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급급해지고 지쳐간다. 화창한 어느 날 에릭은 폴에게 핀잔을 듣고, 계절을 잊은 정원에서 자위행위를 한다. 더 이상 시들어 버릴 것이 없어진 꽃처럼 슬픈 마음을 그렇게 혼자 해결한다.

에릭은 우리의 청춘이 시든 것처럼 사랑도, 삶도 시들어버린다는 것을 인지하고 가슴 속에 상처를 묻는다. 이미 이별을 경험했던 연인들처럼 서로를 이해하는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별을 결심한다. 그리고 마지막 뜨거운 입맞춤을 기대한다.

과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라잇 온 미’는 영화사 ‘레인보우 팩토리’의 첫 수입판매 작품이다. 청년필름을 운영하는 김조광수가 본격적으로 퀴어 영화 사업을 해나가기 위해 레인보우 팩토리를 세웠다.

이 영화는 작품성을 이미 인정받은 영화다. 2012년 베를린 영화제 테디베어상 수상을 비롯해 2012년 선댄스 영화제, 트라이베카 영화제에 초청돼 상영됐다. 하지만 이 영화가 동성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해도 대중적인 보조를 맞추기는 다소 빠르다. 색안경을 끼지 않고 보면 전혀 어색할 것 없는 이들의 사랑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하지만 그런 먹먹함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사랑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본질에 있어 서로가 똑같다. 사랑은 사랑이고, 사랑의 속 모습 또한 변하지 않는다.

레인보우 팩토리는 홍보물을 통해 이 영화의 최고 대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내게 최고의 남자야’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이 영화의 최고 대사는 에릭과 싸운 폴이 따로 자겠다고 소파에 누울 때, 에릭이 폴에게 하는 말 ‘넌 꼭 나와 같이 침대에서 자야 해’다. 이 말 너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