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훈 시인은 갈수록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노동자들의 삶을 하나하나 시로 되살리면서 우리 사회의 가슴 아픈 지점을 진단한다. 무엇이 좋은 노동이고, 그런 좋은 노동이 존중되는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지 섬세하게 짚어낸다. 특히 그는 급격히 우경화되고, 민주주의가 실종돼가는 한국 사회에 대한 우려를 통렬하게 쏟아낸다.
“옛날에는 술 한 잔 먹어야 쉬쉬하며 나오는 얘기가 ‘빨갱이’였다. 이제는 대놓고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한다. 분단이 고착화되고, 사회 동력인 노동자들이 빨갱이로 몰리고 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거나 노동자를 두둔하면 빨갱이라고 한다. 너무 안타깝다. 정신 차려야 한다.”
정세훈 시인은 19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7살부터 소규모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하지만 진폐증으로 나날이 몸이 쇠해 표피가 벗겨지고 온몸에서 진물이 났다. 그는 25년을 거주하던 부평을 떠나 요양 차 김포로 이주한 뒤 2006년 큰 수술을 받았다. 생사를 가르는 어려운 수술이었다.
“박영근 시인이 죽던 다음날 수술을 받았다. 백병원에서 박 시인이 혼수상태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날 수술했다. 오전에 전화가 왔다. 박영근 시인이 죽었다고(한숨). 나는 다행히 몸이 나아져 2011년부터 활동하게 됐다. 첫 활동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고공 투쟁을 할 때였다. 13년 만에 처음 간 현장이었다. 거기에서 시낭송을 했다. 대우는 나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래서 어색하지 않았다. 부평 앞에 대우자동차 공장이 있다. 1998년 IMF 때 정리해고의 아픔이 처절했던 곳이다. 나는 이곳을 지나다니면서 대우자동차 이야기를 시로 쓰곤 했다. 13년이 지난 뒤 다시 대우자동차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었다. 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 인생관이다. 글을 쓰든 안 쓰든 사람으로 태어나면 주변에 기여하면서 사는 것이 좋지 않겠나. 1980년대에 영세한 공장에서 일하는 나로서는 큰 공장에 다니면서 조직화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소외감도 많이 느꼈다. 이제 다시 내 몸이 돌아와서 감사하다. 그때 못했던 것들을 열심히 하려고 한다. 천행으로 재생된 삶이다. 사회에 헌신하고 싶다. 현장을 다니며 ‘행동하는 문학’을 하려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닿는 시, 공감하는 시를 쓰고 싶다. 열심히 쓰려고 한다. 힘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정세운의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 1950~60년대는 모두들 어렵게 살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더욱 열악했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였고, 어머니는 일 년에 열 달을 누워 지내는 병자였다. 아무런 약도 필요 없었다. 아버지가 생아편을 구해와야 진정이 됐다.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은 아이로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김소월의 시, 진달래를 봤다. 아래층 부잣집 아들이 서울에 이사 가면서 책과 크레파스 같은 것을 버리고 갔다. 그 당시 크레파스라는 것도 처음 봤다. 김소월의 진달래를 보면서 내가 주인공 같아 너무 가슴이 아팠다. 우리 부모님에 대해 내가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시를 좋아했다. 공부를 많이 하면 시인이 되고 싶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잊고 지냈던 시인의 꿈은 검정고시 공부를 하면서 다시 싹텄다. 국어 교과서의 현대시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습작을 시작했고, 공장에서 야근할 때는 파지에 시를 썼다.
그는 1989년 ‘노동해방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1990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5편의 시를 발표한 것을 문단에 나온 근거로 삼아 왔지만, 이번 시집을 통해 바로잡았다. 그 당시 노동시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얘기만 나왔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영세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주목을 받았다.
연배가 있는 독자가 아니면 ‘노동해방문학’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노동해방문학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의 입장과 노선을 대변하는 월간지였다. 하지만 이 책에는 사노맹의 정치노선과 당면 투쟁과제를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뿐만 아니라 정치평론, 문예비평, 투쟁수기, 생활글, 원전탐구 등이 함께 실렸고, 당시 민주 노조들의 투쟁현황에 알리는데 주력해 노동자, 학생, 현장활동가를 중심으로 많은 애독자가 있었다.
이 책은 1989년 4월에 창간호와 5월호를 냈지만 노태우 정권의 탄압으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5월 26일 발행인과 편집국장의 연행과 구속, 사무실 수색 등으로 6월호를 내지 못했지만 그해 6·7월 합본호로 제3호를 발행하면서 명맥을 이어오다 1991년 신년호까지 열 권을 내고 종간됐다.
정세훈은 자전적 이야기,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 현장을 찾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시로 풀어냈다. 또 이웃들의 힘겨운 삶을 적나라하게 우리 앞에 끄집어내 스스로 성찰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의 언어는 시인 특유의 소박함과 정겨움으로 가득하다. 유명 문학지에 실린 현학적인 시와는 차원이 다르다.
“문단에서 주목받는 시, 요즘 나오는 신세대들의 시도 있다. 시라는 것은 만인이 읽어서 뭔가 울림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시의 기본 형식은 지켜야 하지만 전문가들만 이해하는 시를 써서 뭐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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