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박영철 감독 - 영화 ‘동학, 수운 최제우’, 백성들은 왜 봉기했을까?

이동권 2022. 10. 2. 20:44

박영철 감독


‘사극 독립영화.’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다. 그것도 저예산으로 만든 장편영화란다. 사극은 으레 큰돈을 들여야만 제작이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이 깨진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극 장편 독립영화’라는 타이틀은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영화 ‘동학, 수운 최제우’의 제작비는 7천여 만원. 예상보다는 많이 들었다고 하면 화를 내려나. 1천만 원, 2천만 원 들여 찍은 독립영화들을 꽤 많이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극이라는 특수성에다 최소한 고생한 스태프들, 등골을 빼먹을 수 없는 일. 보통 상업영화들이 기본 수십억 원을 들여 찍는 것을 감안하면 핏대가 서고도 남을 만하다. 내가 잘못했다.

문득 든 생각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제작지원을 받을 수 없었을까?’ 철부지 같은 생각이다. 이창동 감독의 ‘시’도 심사에서 떨어져 제작지원을 받지 못했다. 갑자기 입맛이 써진다. 박영철 감독의 입맛은 쓸 정도가 아닐 듯싶다.

“영진위가 영화계를 주도하는데 자기 몫을 못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콘티 부족, 서류 미비로 제작지원 작품에서 제외된 적이 있었다. 영화를 행정적으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다른 투자자의 지원의 만들어졌고,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어떻게 서류에 다 적을 수 있겠느냐. 이런 게 바뀌어야 한다. 좀 더 심사 기준을 자율화하고, 감독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류가 아니라 심층 인터뷰, 대화를 통해 심사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영진위가 제작 지원했던 영화들은 일부 평가가 좋지 않았다.”

위인전은 왠지 진부한 느낌이 있다. 언제나 민중을 생각하고, 언제나 민중과 행동하길 원했던 동학사상의 창시자 ‘최제우’. 이처럼 올바르고 곧은 사람의 이야기는 진지함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영화는 끌린다. 험악하고 치명적인 자본과 외세의 위협이 목을 조이는 현실은 구한말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서일 게다.

그럼 영화적으로 보면 어떠할까. 이 영화는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New Currents) 부문 경쟁작으로 선정됐다. 부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한국영화 가운데 유일한 독립영화다. 이로써 ‘최제우 위인전’은 수준 이상의 영화인 건 분명해졌다. 유망한 아시아권 신인 영화 감독을 뽑는 섹션에 아무런 작품이나 올릴 리 없지 않은가.

전찬일 영화평론가의 변을 보니 이 영화에서 풍겨나오는 냄새가 조금 맡아진다. 전 평론가는 내적 몽타주가 돋보이는 정교한 화면구도, 정중동의 극적 리듬과 미장센, 영화적 ‘내공’을 짐작케 하는 적잖은 시청각적 오마주들, 비주얼 못잖게 인상적인 음악을 포함한 사운드 효과가 이 영화의 덕목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박 감독은 겸손 모드다.

“동학을 잘 모르는 젊은 평론가들과 30대 후반 이상 평론가들의 평이 갈린다. 평론계도 세대 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박영철 감독은 1995년에 음악감독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연출은 2000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출품한 단편영화 ‘다카포’가 처음. 김기덕 감독처럼 정식으로 영화를 배운 적도 없단다. 현재 나이도 오십 대 중반. 하지만 영화에 대한 박 감독의 편애는 남다르다. 얼굴 표정에서도, 대화의 억양에서도 영화에 대한 열정이 느껴진다.

“할 줄 아는 게 영화밖에 없다. 계속 영화를 찍을 예정이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니까 알바를 한다. 정지영 감독 같은 분도 어렵게 살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도 10년 만에 영화 ‘부러진 화살’을 찍었다. 내 사정도 비슷하다.”

열정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현실이다. ‘세트장 없이 찍는 사극 영화’. 보통 힘든 게 아니었을 듯싶다.

“카메라를 움직일 수가 없다. 조금만 움직이면 전선이 보이고 건물이 카메라에 들어온다. 사극이어서 더욱 어려웠던 것 같다. 대장금 세트를 써보려고 했는데 하루 임대료가 400만 원이더라. 쓸 수 있겠느냐?”

영화 ‘동학, 수운 최제우’는 민족사상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이야기다. 구한말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고 사회 변혁을 일궈내기 위해 인내천 사상을 만들었지만 끝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처연하게 최후를 맞아야 했던 최제우의 삶을 그린다.

당시 조선은 외척과 세도정치가 지속된 데다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가 고조돼 사회는 심각한 혼란에 휩싸였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있었다. 최제우는 유·불·선과 같은 기존의 사상으로는 작금의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사상을 정리하고 융합해 ‘동학’을 창시했다. 하지만 동학은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성리학을 부정하고,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추구했기에, 최제우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박영철 감독은 자신의 첫 장편영화의 화두로 왜 동학을 꺼내놓았을까?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돼 있는 ‘동학혁명’. 백성들이 부패한 조정을 향해 봉기했던 그 주체적인 핵심이 궁금했다. 그것은 못 살겠다. 잘 살아 보자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민중의 나라, 민중을 위한 나라였다. 그래서 동학사상의 창시자 최제우에 관심을 갖게 됐다.”

박 감독은 3년 간 동학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을 거치면서 우리 영화가 그동안 극적인 재미만 치중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가상의 인물까지 등장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동학사상이 우리 민족의 반외세, 반봉건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종교처럼 남아버린 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동학혁명’이 단순히 외세를 물리치기 위한 민중 봉기가 아니라 서양 ‘사회 계몽주의’처럼 우리 민족이 만들어 낸 고유 사상이란 점을 부각했다. 또 최제우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그의 인간적인 면도 상상으로 풀어냈다. 이것이 그가 이 영화에서 강조한 점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마지막 부분부터 만들었다. 해월 최시형이 최제우의 밀지를 받아 들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최시형은 최제우의 제자로 고비원주(高飛遠走), ‘높이 날아서 멀리 가라’라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했다. 마치 레지스탕스처럼 도망 다니면서 포교를 한 인물이다.”

최제우가 만들고 최시형이 퍼뜨린 동학은 녹두장군 전봉준과 농민들이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봉기한 동학농민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동학은 실학사상이 태동하게 되기까지 실용 사상의 근간이 됐다.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박 감독의 영화를 보러 올까. 그는 별로 자신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1천만 관객 시대라고 하지만 이러한 미사여구는 일부 영화의 이야기일 뿐이다.

“대기업이 제작하고 배급해서 상영하는 그런 영화가 흥행된다. 결국 자본의 논리에 따라 한국영화가 움직인다. 하지만 영화는 다양해야 한다. 대기업이 만든 영화, 중소기업이 만든 영화, 독립영화가 공존하고 자생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이 영화는 독립영화지만 지독하게 독립영화스럽다. 박 감독의 가족들이 제작에 참여했고, 배급도 그가 직접 했다. 그가 배급을 맡게 된 이유는 지인의 권유 때문이다.

한 독립영화 감독은 자기 비용으로 1억 원을 들여 영화를 만들고 배급사에 배급을 맡겼다. 하지만 돈은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작품성 있는 영화로 꽤 알려진 영화였는데도 그렇다. 지인이 그러더라. ‘직접 배급하세요. 제 꼴 납니다.’ 하지만 그가 배급을 하는 이유가 꼭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배급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배우고 싶어서다.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내가 배운 정보와 노하우를 알려주고 싶다. 자생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이 영화에는 연극판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등장한다. 최제우 역은 한국 연극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박성준이 맡았고, 중견 배우 송경의가 최제우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상주목사 ‘조영화’의 역을 맡았다. 조영화는 동학 배척운동의 거목으로, 이 영화에서는 악역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