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조갑상 소설가, 경성대 교수 - 분단의 산물 ‘국민보도연맹’

이동권 2022. 10. 3. 18:56

조갑상 소설가

조갑상의 ‘소설’은 여전했다. 빈틈없이 설정된 구조, 섬세한 통찰과 건조한 문체 그리고 우리 시대의 부조리와 만연한 침묵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주제의식까지, 그의 소설은 한 번 손에 잡으면 쉽게 놓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러한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 힘은 사근사근하게 씹히는 ‘대사’ 때문인 것 같다. 또 그의 소설은 친절한 데다 군더더기가 없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쉽고 술술 잘 읽힌다.

조갑상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전쟁 이야기를 자주 들으면서 자랐다. 전쟁의 광기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것이다. 특히 그가 태어난 경남 지역은 전쟁의 참혹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는 한국전쟁 중 최초로 집단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국민보도연맹’이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 전향자들을 중심으로 만든 조직이었다. 하지만 실적주의와 할당제로 인원을 채우기 위해 너도나도 가입을 시키다 보니 그 수가 30만 명에 달했다. 국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초기 후퇴하는 과정에서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로 검속하고 즉결처분하는 일이 벌어졌다. ‘북한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해버린 것이다.

조갑상 소설가가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다룬 장편소설 ‘밤의 눈’을 내놓았다. ‘밤의 눈’은 어두운 한국의 근현대사를 섬세하게 건져 올린 수작이다. 그는 이 소설을 “기억의 서사, 또는 추모 불가능에 따른 산자들의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보도연맹희생자 문제는 ‘애도 불가능한 죽음’이라는 주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민간인 희생은 전쟁의 예외적 죽음이기도 합니다. 죽은 자를 추모하고 그들의 넋을 달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임을 말하는 문화적 장치임에도 시대적 상황에 의해 차단되어왔다는 점에서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습니다.”

이 소설은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밤에는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20여분이 지나면 동공이 열리고 망막의 감도가 높아지면서 앞이 잘 보이게 된다. 이처럼 ‘밤의 눈’이라는 제목은 뭔가 ‘어두운 과거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듯싶었다. 그러나 그 뜻은 생각보다 더욱 진지했다. 

소설 속의 장면을 먼저 읽어보자.

마주치고 외면하는 눈길들은 공포로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갑자기 줄 지어 끌려온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듯 섰다. "죽이는 기다." 누군가가 신음같이 내뱉었다. 뒷걸음치던 한 사람이 넘어지고 덩달아 같이 묶인 사람까지 자빠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선걸음에 잡혀왔는지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양복을 입은 사내가 허둥거리자 군인이 오금을 걷어차 주저앉혔다. 한동안 밝은 달빛 아래 그림자들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대원들이 그들을 구덩이 앞에 꿇어앉혔다. 공포에 질렸는지 그들은 나무토막 마냥 움직이지 않았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몇 사람의 어깨가 흔들렸다.... 총을 맞은 자들은 큰 움직임도 없이 그냥 앉은자리에서 고개를 처박으며 고꾸라졌다... 생전 처음 들어본 총소리에 정신이 빠졌는지 사람들은 허수아비처럼 끌려왔다. 몇몇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소설 중에서

이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처형장으로 이끌려가는 사람들의 공포 가득한 눈길을 소설로 목격할 때, 우리는 모두 목격자이자 증언자의 위치를 피할 길이 없어진다. 때문에 우리는 이웃의 고통과 통증에 관한 목격자이자 증언자로 ‘밤의 눈’을 떠야만 하는 조건에 놓인다. 오늘날 펼쳐지는 다양한 위기들을 기억해야 할 윤리적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시작되고 끝을 맺는다.

조갑상 소설가는 ‘밤의 눈’을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단지 ‘살풀이’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이루는 체계와 가치가 수정되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그러한 의도 때문에 이 소설을 다소 깐깐하게 느낄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글쓰기는 목적과 역사에 짓눌리지 않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역사를 완연하게 되살려 그 당시를 실체로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정말로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6.25 전쟁은 물론 거기에서 비롯된 민간인 희생은 모두 분단의 산물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분단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설 속의 두 인물은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과거가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70년, 80년대 이후까지 계속된 비극임을 말해 주는 존재들입니다. 아무쪼록 독자들이 ‘밤의 눈’을 6.25 전쟁과 그 이후 지속되고 있는 분단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