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묵직한 대금 소리가 그립다. 휘영청 뜬 달을 바라보면서 곡주 한 잔 기울이면 촉촉하게 마음을 적셔오는 대금 소리가 절로 귀에 착착 감긴다. 자연의 품에 안긴 가을은 격렬한 박자의 로큰롤이나 화려한 클래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잠시 일상을 놓고, 지친 영혼의 휴식을 위해 신묘한 대금산조 선율에 빠진다.
한국에서 대금산조 최고의 명인은 인간문화재 죽향 이생강 선생이다. 이광훈은 이생강 선생의 아들이자 이생강류 대금산조 전승 후계자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활발한 연주 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금산조는 우리 국악 중 기악 독주 음악의 하나로 고대로부터 전해온 남도소리의 시나위와 판소리의 방대한 가락을 장단에 실어 연주하는 곡이다. 특히 이생강류 대금산조는 진양, 중머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엇모리, 동살풀이, 휘모리의 장단변화로 구성된 국악의 백미다.
"이생강류 대금산조는 장단도 장단이지만 짜임새가 기가 막힙니다. 서양음악 하시는 분들도 감탄할 정도로 화성악과 선율구조가 다양하다고 하시죠. 삼라만상, 우주, 자연의 소리가 이생강류 대금산조에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120분짜리를 작곡하셨죠."
아버지라는 큰 산이 가끔은 그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듯싶다. 아무리 잘해도 이생강의 아들이라는 주위의 선입견은 그가 앞으로 커 가는데 그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있어 고맙고 또 든든하다.
"30대 중반까지 제 이름이 없었지요. 항상 이생강 아들 이광훈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었고요. 지금은 오히려 더 편안합니다. 아버지께서 계시니까 활동하기도 든든하고 항상 제가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시니 감사드리지요. 제 곁에 오래 계셔야 할 텐데."
이광훈 연주가는 태어나면서부터 대금 소리를 듣고 자랐다. 아버지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로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금을 생활 안에서 배우게 됐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항상 접하다 보니 머릿속에 온통 한국 전통 민속음악뿐이었습니다. 10살 즈음에 우연히 아버지 대금을 입에 대서 불었는데 바로 소리가 났지요. 연습 없이 처음에 소리 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바로 머릿속에 있는 아리랑을 연주했습니다. 저도 불면서 신기했지요."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광훈도 마찬가지다. 특히 대금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국악을 하지 않았다면 그도 음악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과 같다.
이광훈이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건 15세부터다. 그 전에는 운동을 좋아해서 태권도, 유도, 십팔기 등 격투기를 즐겼다. 그리고 아버지가 한국 최고의 연주가였지만, 아버지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을 하면서부터 아버지의 존재감을 실감했다. 그가 "너무 거대한 산"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생강 명인은 한국 최고의 연주가였다.
"본격으로 대금 연주자가 되고자 했던 때는 15세 때부터에요. 운동을 너무 격렬하게 하다 보니 창자가 꼬여서 한동안 아무것도 못 하면서 대금을 불기 시작했어요. 그때 아버지의 대를 이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집안에서 전부 반대했지요. 아버지만큼 안 될 거면 아예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저 혼자만의 오기가 생겼지요. 그래서 아버지 모르게 연습을 했습니다."
트라우마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 앞에서는 절대로 연습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버지가 뛰어난 연주가라고 해서 모든 아들이 대를 제대로 잇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버지의 후광에 가려 뛰어난 연주자로 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광훈은 달랐다.
그는 아버지에게 대금, 단소, 피리, 소금, 태평소를 사사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한국음악을 전공하고 1991년부터 현재까지 일본, 캐나다, 프랑스, 미국, 헝가리, 러시아, 핀란드, 파키스탄, 노르웨이, 금강산 등 나라 밖에서 200여 회를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가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공연은 아무래도 1992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대금독주회일 것이다. 카네기홀 무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음악인들에게만 장소를 내주기 때문이다.
"1992, 1993년 카네기 홀에서 연주를 했는데 첫 번째는 멋모르고, 그냥 음향시스템에 감탄만하고 지난 거 같아요. 그냥 부러워서. 그래도 카네기 홀에서 연주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지요. 다음 해에 그 무대에 섰을 때는 자신감이 대단했어요. 건방지지만 별 거 아니라는 생각. 외국 사람들은 어떻게 대나무에서 그런 소리가 나느냐고 모두 의아해했지요."
그는 수상경력도 대단하다. 한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경연에서 최고상을 거머쥐었다. 전주대사습에서는 기악부 장원을, 서울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에서는 종합부문 대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뉴욕에서 유학 마치고 한국에 나왔을 때 제가 유학 때문에 실력이 많이 줄었다고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딱 일주일 연습하고 전주대사습에 나갔지요. 미국에 있을 때도 매일 연습을 했거든요. 그리고 대통령상은 인생의 마지막 상이니까 준비를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항상 지금까지 잘 되면 본전 못 하면 엄청 욕을 먹었지요. 음악 때문에 욕먹은 적은 없지만 항상 부담은 엄청났어요."
이광훈은 2008년 4월 24일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제 제45호 대금산조 준 문화재가 됐다.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이 4월 24일이어서, 귀한 생일 선물을 받은 셈이다.
이생강 명인과 아들 이광훈의 길고 긴 음악 인생은 한국 전통국악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전통국악에 대한 정부의 정책이나 지원에도 남다른 건의사항이 있다.
"국악에는 두 가지의 음악이 있습니다. 정악(궁중음악)과 민속악입니다. 정악은 국립국악원에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움직이는데 민속악은 그렇지 않아요. 연주 실력이 열 손가락 안에 들어야 괜찮고 나머지는 아주 많이 힘들지요. 대학 들어갈 때 40명이었는데 지금은 활동하는 사람이 3명밖에 없어요. 국립국악원처럼 민속악에도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정부나 일반인들은 몰라요. 국악이면 다 같은 줄 알지요. 서양음악의 클래식과 재즈처럼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런데 전문 국악을 중·고등학교부터 같이 가르쳐요. 음악적인 장르가 완전히 틀린데 참 아이러니 하지요."
이광훈 연주가는 앞으로도 음악인으로서 본분을 지키기 위해 연주에 전념할 예정이다. 또 국악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전통국악전문 공연장을 만들 계획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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