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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너지공단 - [인터뷰] 이경자 소설가, 생명의 최고 가치는 살아남는 것

이동권 2021. 11. 13. 15:14

이경자

양지바른 곳에 동백꽃이 만발했다. 담장 앞 개나리는 별천지를 연출하고, 앙상한 벚나무 가지에는 금붕어 눈알처럼 꽃망울이 툭툭 불거졌다. 봄이 되니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이 충동질 친다. 발롱 발롱 핀 산야의 들꽃들이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다. 요즘 산에 가면 진달래가 방시레 웃기 시작할 때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라 떠나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히 않다. 화사한 꽃처럼 웃으며 살고 싶은데 일상은 계속 잘그랑잘그랑 소리를 낸다. 할 일도 쌓여있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다. 게다가 돈 쓸 일도 태반이다. 부모님은 아프고, 아이들 교육비는 계속 늘어가고, 어시호는 왠지 부부관계도 소원해진 것 같다. 어떤 때는 집안에 한차례 큰 폭풍이 밀려올 것 같은 예감에도 사로잡힌다. 이경자 소설가를 만나 이런저런 불안을 털어놓으니 그녀는 그냥 웃어버린다.

“살아보니까 따뜻함이 인생에 끼치는 영향은 아주 크지 않아요. 태풍, 해일, 폭풍우가 인간의 생명력을 더욱 단단하게 하지요.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것에 ‘긍정의 힘’을,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자연스러운 열정’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우리 몸이 추우면 움츠려지고, 나쁜 것을 먹으면 설사하는 것처럼. 우리는 오랜 인류의 역사 중 어느 한 마디에 살고 있어요. 그 마디마다 여러 가지 특성이 있죠. 이런 마디에 불어온 기류 같은 것에는 저항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것이 지혜예요. 생명의 최고 가치는 살아남는 것입니다.”

이제는 남자들도 말해야 해요

소설가 이경자는 문학의 힘과 치유 능력을 믿는다. 자기소외의 고통을 앓는 사람들을 감싸 안고, 누렇게 곪은 상처에서 새살이 스스로 돋아나기를 기다린다. 그 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역사에 대한 통찰, 생에 대한 겸허가 자리한다. 그는 남이 알까 두려워 쉬쉬하는 인간의 성욕부터 분단 조국이 만들어낸 거대한 상흔까지 두루 껴안으며 ‘슬슬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세상’을 희망한다.

엄밀히 얘기하면 이경자는 감성보다 이성이 발달한 사람이다. 지식과 경험이 지혜로 전환되려면 냉철한 이성이 필요하다. ‘낭만적 감상주의는 자칫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 있기 때문’에 정신을 집중해 현실을 살피고, 사물의 진실을 간파해야 한다. 그의 글에서 넘쳐나는 서정적인 감성이 깊은 울림으로 극대화되는 이유도 이런 ‘로고스’가 바탕이 돼서다. 가슴을 울리는 몇 마디 문장은 누구나 쓸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복잡 미묘하고 섬세하며 예민한 동물이다. 제아무리 터프한 남성도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참아야 하는 순간은 오기 마련이다. 그것을 꿰뚫어 알아차리지 않으면 소설은 관념적이고 피상적으로 흐르고 만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갖가지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무수한 죽음도 목도해야 했고, 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불편했다. 우리 사회가 전방위적으로 위태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어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다시 말하면 청년은 경쟁에 치여 살고, 중장년은 미래가 불안하다. 이경자는 평생 소설을 쓰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아픔을 웅숭깊게 들여다봤다. 으레 그러리라고 여기는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자통까지 애정으로 포용했다.

“우리 사회가 남자들을 못살게 해요. 가부장적인 사회로부터 남자에게 주어진 가족, 사회, 국가에 대한 의무와 능력,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식의 관념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남자들이 그러한 것을 안고 살아가기에 우리 사회는 말이 안 되는 사회로 가고 있어요. 일자리는 줄어들고, 경쟁은 치열하고, 직장에서는 언제 잘릴지 모른 채 살아요. 40대 때 퇴직하면 여태까지 제도 안에만 있었기 때문에 사회를 잘 몰라요. 하지만 사회적 자존심에 자기도 잘 모르는 일에 뛰어들었다가 망하거나 열패감에 빠지죠. 이제는 남자들도 말해야 해요. ‘우리는 책임질 수 없다’, ‘여자 하고 똑같다’, ‘다 같은 인간이다’라고 인정해야 해요.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는 모택동 시절 감방에서 생활할 때 혼자 똥 닦는 것, 셔츠 단추 채우는 것, 운동화 끈 매는 것조차 못했어요. 자기는 황제라며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예요. 비약이 심했지만, 요즘 남자들 너무 안타까워요. 내면은 갈팡질팡, 어릴 때부터 남자는 울면 안 된다,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어요. 남자들끼리 만나면 성기가 크네 작네, 길이가 기네, 짧네 이런 얘기를 해요. 성기는 여성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애 낳는 생식기예요. 성기의 크기는 여성의 쾌락과는 상관없어요. 허구적 남성성이에요. 여성의 성기도 전 세계 30억 명 모두 달라요.”

내가 젊다면 그냥 떠나겠어요

따뜻한 봄기운은 산천을 연둣빛으로 물들이고,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낸다. 이처럼 우리도 봄기운 같은 것을 일상에 쉴 새 없이 불어넣어 ‘행복한 삶’을 만들어보려고 애쓴다. 지난하고 힘겨운 일상을 조금이나마 의미 있는 것으로 전환해보려는 안간힘이다. 그래서인지 돈보다 삶을 풍족하게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늘고 있다. 레포츠는 물론이고 악기 연주, 봉사활동 등 갖가지 여가 생활로 마음속 빈 공간을 채우려고 야단들이다. 이경자는 ‘말리고 싶지 않다’고 손사래를 친다.

“직장은 자신을 위한 자기 성취가 아니에요. 월급에 내 능력을 파는 곳이죠. 인간은 직장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해도 근원적인 기쁨을 얻지 못해요. 나라는 존재가 가진 창조적인 면도 사회에서 풀고 인정받고 싶은 거죠. 음과 양, 안과 밖이 모두 조화를 이뤄야 사람은 편안해져요. 돈 버는 일이 아니라 창의적인 일에 매달려보면 행복까지는 아니어도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을 겁니다.”

반면 세대와 계층의 관계없이 사회에 분노하고, 위로에 목말라하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심화되고, 건강한 비판조차 허락되지 않을 경우도 생긴다. 성실하게 일한다고 조직에서 최고의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남들보다 뛰어나거나 차별화된 역량을 소유한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가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성찰하지 못하게 해요. 그러다가 막다른 벽에 부딪치면 분노가 일어나지요. 어느 정도 분노는 필요해요. 독재자도 분노를 이용했어요. 괴벨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자극해 집단적으로 무엇을 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분노의 에너지가 파괴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으로 작용해야지요. 그런데 사람들끼리 공감과 소통이 줄어들고 타인에 대해서도 모르게 되니 분노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요. 예를 들면 사람들은 뱀을 보면 깜짝 놀라요. 성서에서부터 뱀을 사악하게 그려내 관념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인식하게 만들었지요. 하지만 뱀은 내가 공격하지 않으면 물지 않아요. 옛날 대가족 사회에서는 좁은 방에서 같이 살았어요. 식구들끼리 오글오글 모여, 서로 방귀 냄새도 맡아가며, 한 그릇에 담긴 음식을 나눠 먹으며 살았지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함께 살면서 인간관계도 배웠어요. 요즘은 30평 넘는 집에서 혼자 사는 사람도 있어요. 타인도 경계하고요. 옛날에는 고속버스를 타면 차마 혼자 먹지 못해서 옆 좌석에 앉은 사람과 나눠 먹었어요. 요즘은 같이 먹는 것도, 나눠주는 것도 싫어해요. 사람이 경쟁, 경계의 대상이 됐어요. 우리 모두 건강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사회가 삭막해지면서 사랑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도 부지기 수고, 아이를 낳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부부들도 많다. 교육은 둘째 치고 아이를 밖에 내놓기가 무서운 것이다.

“점점 연애관이 물질화되고 있어요. 젊은 사람은 대부분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결혼도 너무나 타산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남자들도 연애하면서 감정을 소모하는 것보다 자기들끼리 술 먹고, 여행 가고, 편하게 노는 것을 더 선호해요. 연애보다는 섹스 파트너를 더 좋아할걸요. 순애보는 죽은 말이죠.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모두 얻는 것처럼 사는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못해요. 그럼에도 비관적이어서는 좋지 않아요. 내가 젊다면 그냥 떠나겠어요. 힘이 있으니까, 노숙을 해도 끄떡없고, 밤을 새워도 금방 회복돼요. 힘이 있을 때 스펙을 쌓고 쾌락을 얻는 것에만 치중하지 말고 시간을 내서 모르는 세계로 떠나 보세요. 젊은 세대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행복은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행하지 않는 것

이경자는 1988년 발표한 베스트셀러 『절반은 실패』로 한국 사회에 파란을 일으켰다. 이 소설은 ‘결혼은 성공, 이혼은 실패’라는 이분법적인 편견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내 결혼은 실패했지만 지금이라도 이혼했으니 완전한 실패가 아니라 절반은 실패’라는 새로운 각도로 삶을 바라보도록 했다. 이어 80만 부가 팔린『혼자 눈뜨는 아침』과 『황홀한 반란』으로 인기 작가 반열에 올랐고, 『가면』, 『할미소에서 생긴 일』, 『사랑과 상처』, 『남자를 묻는다』 등을 통해 여성이 제도, 관습, 고정관념 등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정당성을 그려냈다. 그래서 그녀를 여성주의 작가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가 탐구한 여성은 남성의 반쪽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였고,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인류애였다.

“여성은 인류의 절반이에요. 그런데 인류의 절반이 관습, 문화, 풍속에 의해 차별을 받았어요. 절반에 대한 차별이 사회화된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어요. 생명은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해요. 그래서 나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어요. 소설가는 그래야 해요. 소설가는 역사와 현실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는 사람이에요. ‘왜’로부터 주제를 만들고 소재를 찾고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사람이죠. 『절반의 실패』는 일제강점기 ‘신여성’이래 한 번도 도전받지 않았던 여성 문제를 건드린 소설이에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문제는 유효하다. 본질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산적해 있다. 예를 들면 여성의 성욕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다. 우리나라 유흥업소의 대부분은 남성을 위한 공간이지 여성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좀 더 앞선 관점으로 사회를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성이 성욕을 푸는 방법은 쉽지 않아요. 성욕은 남성과 여성이 차이가 아니라 사람의 차이예요.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남성은 성욕이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여자도 하루에 한 번씩 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일 년 동안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시대가 변하듯이 문제도 변해요. 고정돼 있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아요. 여성 문제도, 차별의 양상도 변했어요. 다른 의미에서 보면 남성이 우리 사회에서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살펴보는 것이 성숙한 시선이에요.”

이경자의 소설을 읽다 보면 힘이 푹 빠졌다 어느 순간 불끈 솟는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외롭고 고독해 보여 슬퍼지기도 했지만 자신을 속속들이 성찰하며 중심을 잡는 주인공들을 보면 기운이 났다. 또 그녀의 소설은 일 때문에 정신이 없고 잠을 자지 못해 괴로울 때 생기는 지긋지긋한 두통도 말끔하게 씻어줬다. 삐걱대며 돌아가는 녹슨 기계에 발라주는 윤활유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소설의 힘은 여러 가지예요. 소설은 모르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고, 다양한 인간들의 삶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자신을 반추하도록 하죠. 나는 부당한 것, 삶을 옥죄이는 것, 거짓 이런 것을 들춰내면서 반작용으로 평화와 안락함, 상호 존중,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것이 가장 중요한 내 소설의 힘입니다. 나는 내가 늙어가는 것이 참 좋아요. 젊을 때와는 다르게 분노까지도 따뜻하게 쓰는 법을 알게 됐고, 나이가 들수록 부드러운 것이 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요. 나는 할머니 주의자예요.”

올해 나이 68세, 황혼에 접어든 나이다. 아직 호호백발도 아니고 허리가 꼬붓한 노인도 아니다. 아무 탈 없이 튼튼하고 굳세다. 건강한 정신과 단순한 생활이 남겨준 보물이겠다. 또 평생 글을 쓰며 사람만을 생각해왔던 집념과 차곡차곡 쌓인 경험들이 만들어낸 지혜는 평범함을 초월한다. 그래서 이경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려는 행복의 정체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행하지 않는 것이에요. 내 삶이 타인을 불행하게 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이 행복이죠. 또 내가 누구보다 잘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에요. 나도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워낙 책도 안 팔리는 시대이고, 젊은이들도 나를 잘 몰라요. 그래도 나는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잘 알고 있고 감사해요. 남보다 더 갖고자 하지 않는 나 자신에 만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