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을 풀지 못하고 고통받는 가족들
어떤 이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닿을 수 없는 현실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 삶의 무상을 느낄 겨를도 없이, 의식의 어두운 곳에서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깊은 고통을 잉태하는 사람들. 남북 이산가족과 실종가족들의 피맺힌 절규와 한숨에 땅이 꺼져간다.
조의길(83) 할머니의 눈빛은 어느새 형제들과 함께 뛰놀던 곳으로 향해 있었다. 혈관의 피와 같은 부모 형제를 만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 남긴 서글픔이었다. 얼굴이 동그랗게 생겨 어린 시절 '봉래'라고 불렸던 조 할머니. 평안남도 안주군 연월면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열다섯 살 무렵 조혼하고 평양에서 잠시 살다 남편의 고향인 황해도 평산군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피난을 떠나면서 가족들과 뜻하지 않은 생이별을 했다. 북측에는 부모님과 오빠 2명(조덕길, 조명길), 남동생 1명(조원길)이 살고 있었다.
이산가족이 죽어간다
“큰오빠의 자손이 벌써 환갑이 됐을 거야. 네 살 때 보고 못 봤는데. 이남으로 내려오면서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았어. 그렇게 혼자가 됐지. 무척 외로웠어.”
사실 조 할머니는 피난온 뒤 북측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지 못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혹독한 가난은 가족을 떠올리는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식들이 장성하고 몸에 병이 들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정말 간절해. 죽기 전에 꼭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어. 고향에서 피난 온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활판소(인쇄소)를 하던 외삼촌(김성국)은 돌아가셨다는데,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 생각만 해도 이렇게 눈물이 나와 참을 수가 없어. 직접 당해보지 않고서는 이 고통을 모를 거야.” 연방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치는 조의길 할머니. 이제 그녀에게는 눈과 귀마저 멀어가는 자신을 원망할 일만 남은 것일까.
남풍현(73) 할아버지는 정갈하게 녹차를 우려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시시때때로 덮쳐오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듯했다. “정치적 상황이나 남북관계와 상관없이 서로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상봉이 이뤄졌으면 좋겠어. 만나서 손도 잡아보고 서로 왕래하며 살고 싶은데, 죽기 전에 이뤄질까? 1950년에 헤어졌으니까 햇수로 60년이 됐어.”
남 할아버지는 6·25전쟁 때 형님(남경현)과 소식이 끊겼다. 이날부터 그저 형님의 죽음을 사실로 여겼고, 그렇게 단절돼버린 영상만을 머릿속에서 이을 뿐이었다. 그런데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뒤 어느 날 국정원에서 전화가 왔다. 북한에 살고 있는 형이 아우를 찾는다는 소식이었다.
“형님께서 화상대화를 신청했더라고. 여태까지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갔다가 낙동강 전투가 끝나자 북으로 간 거야. 형님은 참전용사로 북에서 대우도 받았던 것 같아. 대학도 졸업하고, 아들 딸들도 다 대학을 다녔다고 해. 결혼해서 3남매를 낳았고, 지금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살고 있지.”
남 할아버지는 형님과 화상상봉을 하면서 울지 않았다.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사전에 형님에 대한 근황을 전해 들은 데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 눈물조차 마른 상태였다. 그래도 형님과 조카들을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만은 간절했다. 고향 들녘을 거닐면서 못다 한 얘기도 나누고, 부모님 산소에도 함께 가고 싶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 걱정이다.
실종가족의 그리움과 비애
막막한 곳에서 몸부림치듯 떨고 있는 목소리. 잃어버린 가족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애절함, 그야말로 창백하고 야윈 세월이 남긴 상흔이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무엇이 자신을 괴롭히고 어지럽게 만드는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 같았다.
송혜희(당시 만 17세) 양은 1999년 2월 13일, 친구를 만나고 귀가하던 중 실종됐다. 아버지 송길용 씨는 딸이 성폭행당한 뒤 매장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사람들을 동원해 곳곳을 수색했다. 또 인신매매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했다. 그러나 딸을 찾지 못한 채 전 재산을 탕진했고, 송양의 어머니는 딸을 잃고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으로 고생하다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딸의 실종으로 단란했던 집안이 풍비박산 나버린 것이다.
“경찰서에 신고했는데 3일 뒤에 왔습니다. 단순 가출인 줄 알고 보고조차 하지 않았답니다. 경찰이 빨리 왔으면 딸을 찾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딸이 버스에서 내릴 때 30~40대로 보이는 술 취한 남자가 뒤따라 내렸다고 버스기사가 얘기해줬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오늘도 송씨는 화물차를 타고 전국의 건설현장을 돌아다니며, 딸의 생사라도 알고 싶은 심정으로 전단지를 붙인다. 그러나 세상은 모두 돌아앉았다. “세상이 너무 삭막합니다. 다들 자식이 있을 텐데, 자식을 잃어버린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단지를 돌려도 무관심. 전부 휴지통에 들어가고 맙니다.”
조하늘(당시 만 4세) 양은 1995년 6월 구로동 집 근처에서 놀다 행방불명됐다. 새우볶음을 한 움큼 쥐고 밖으로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조양의 어머니는 딸을 잃고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으로 외부인과 접촉마저 끊어버렸다. 자신도 어려서 길을 잃고 미아가 돼 보호시설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아버지 조병세 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딸을 찾아 나섰다. 답답한 마음에 흥신소, 심부름센터에 의뢰도 해보았지만 돈만 뜯겼고, 관공서의 냉담한 반응과 경찰의 늑장 대응으로 총체적인 절망을 경험해야 했다. “이제라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합니다. 실종 가족들을 방문해서 도와줄 게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시는 가족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최초의 반응은 슬픔과 눈물이다. 어딘가에 가족이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저 순간순간의 위안일 뿐. 오히려 그러한 상황은 더욱더 그리움을 키우고 뼈아픈 비애감에 젖게 한다. 가족의 해체는 사회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정부가 나서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치유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조치이자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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