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의 지적 역량은 그 시대에 발간된 수많은 책으로 측정된다. 한 사회의 변화를 판가름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그 사회가 생산한 책의 양과 질을 동시에 따져보면 된다.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책의 안내를 따랐고, 이 같은 배움으로부터 높디높은 사상가나 학자·지도자의 길에 다다를 수 있었으며, 개인의 지적 역량이 모여 하나의 사회도 변모했기 때문이다. 올해도 한국의 출판사들은 독자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쏟아낼 것이며, 그 흐름을 따라 우리 사회도 천천히 변해간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은 책을 읽는다고 해도 그들의 삶에 해가 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양도 중요하지만 질이 우선돼야 한다.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도 “거대 이론은 어느새 사라지고 요즘 서점에는 실용서적들만이 판을 친다”고 개탄했다. 자연사회과학, 인문학 책들이 자본의 논리에 휘말려 사장되고 있다는 한숨이다. 김 대표는 “장사꾼으로는 나가떨어졌지만 젊은이들이 인간과 자연을 알아야만 인류가 살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책을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며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정열을 돈 버는 일이나 출세하는 일에만 쏟아붓는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하는 이 사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재산은 다람쥐도 모으고, 전쟁은 개미들도 하며, 국가는 벌들도 세우는 일. 김 대표가 평생 동안 해왔던 일은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꿈꾸는 사람들만이 감행할 수 길이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세상에 내어놓은 책 한 권, 한 권이 그토록 소중하고 귀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경희 대표가 책을 읽고, 잡무를 처리하며, 손님을 맞는 곳은 10평 남짓한 개인 서재다.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장서와 낡은 가구들이 진열된 이곳은 그의 삶과 학문의 지향을 대신 말해주는 냥 소박하고 고적한 빛을 연방 뿜어낸다.
김 대표는 상대방의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오랫동안 숙명적인 책무를 짊어지고 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고독의 징후도 느껴졌다. 부드러운 말투에서는 활달한 성품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집스러운 면이 있어 분명하고 간결한 것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냐”고 질문부터 한다.
한국 출판계는 암울하다. 부자 되는 책, 오감을 자극하는 책, 각종 수험서나 기술서적 등이 그나마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좋은 책을 만들고 보급하는 인문사회과학서적 출판사들은 고사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 같은 환경에서도 지식산업사는 ‘돈 안 되는’ 책을 꿋꿋하게 출판하고 있다.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경영인이라면 이윤은 고사하고 손해 볼 것이 당연한 책은 내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지식산업사는 ‘모순’이었다. 이것이 김 대표를 만나자고 청한 이유였다.
“나는 문화현장의 일꾼이지 출판사 하려고 한 사람이 아니오.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지식산업사를 이끌어오면서 학자, 예술가들 뒷바라지해왔어.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지. 오늘은 좀 전에 차하순 선생이라고, 서강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인 원로 역사학자를 만났어요. 올해 일흔아홉이신데 정정하셔. 기자 선생이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얘기를 끊지 못했네. 새로운 책에 관한 얘기를 하고 오는 중이거든.”
나는 어떤 종류의 책이냐고 물었다. 또 ‘돈 안 되는’ 책이 분명하다는 확신에서였다.
“‘역사가의 탄생’이라는 책인데, 한국과 일본 원로학자들이 역사가의 길을 걷게 된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 올해 9월 안에 시중에 나올 거요. 와다 하루키 같은 일본의 사학자들을 포함해 이기백, 고병익 선생 등 한국사학자 12명의 이야기야. 오늘 만난 차하순 선생도 그중에 한 분이고.”
예상은 적중했다. 역시 상업성이나 요즘 출판계의 추세하고는 맞지 않은 책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자신의 의무이자 자랑으로 여겼다. 독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돈이 되지 않아도 좋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다.
‘역사가의 탄생’은 논문 이외에는 자신의 얘기를 꺼내지 않는 역사가들이 집단적으로 자기고백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본 동경대학출판사와 지식산업사가 두 언어로 함께 출판하는 이 책은 역사를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선학들이 어떻게 학문에 투신했는지 알려주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근대 한국의 출판사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몸을 바치는 지사(志士)적 역할을 했다. 애국 계몽기에는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밝혀주는 횃불이자 민족 독립의 구심점이 됐으며, 해방 이후 독재체제에서는 민주와 자유를 위해 민중을 의식화하는 선봉에 섰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던 시절에도 출판사들은 책을 통해 참혹한 현실을 알리고 민중을 독려하면서 이 나라의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지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면서 이 같은 출판사의 역할은 퇴색하기 시작했다. 정치 환경의 변화도 있었지만 독자들의 외면이 가장 컸다.
“우리 대학 시절에는 모두들 이상주의자였어. 멀리 봤지.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꿈이 없어. 먹고사는데 바빠. 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배금주의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야. 세상을 멀리 보면서 현실도 봐야 하는데 걱정이요.”
김경희 대표는 젊은이들의 열정이 돈에만 매몰된다면 우리의 미래도 없다고 단도직입적으로 경고했다. 아름답고 순수한 젊음이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돼 가는 현실이 못마땅하고 걱정스러운 것이다. 요즘은 사랑마저 돈과 상품으로 지불하려는 젊은이들도 많다. 김 대표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강렬하게 다가온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또 한 번 찾아오고 있어. 1929년 대공황 당시, 뉴욕 월가를 중심으로 주가가 대폭락하면서 세계경제가 공황에 말려들 때 자본주의가 끝났다고 생각했었지. 그러나 케인즈의 혁명으로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고,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20세기 말에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자본주의가 세계를 뒤덮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미국 경기가 위기에 빠졌다고 해요. 지구 온난화 등으로 제기된 오늘의 인류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젊은이들은 인문학 책, 멀리 보는 책을 보지 않아요. 과거를 멀리 되돌아봐야 앞도 멀리 볼 수 있는데 말이야.”
그에게 요즘도 책을 많이 보는지 물었다.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자는 우문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평생 문학을 애호하고, 숙명처럼 끌어안고 온 그에게는 상당히 애매하고 별스러운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관대하게 대답해주었다. 후학을 아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남의 글을 많이 읽어요. 좋은 원고도 읽고, 좋은 책도 많이 보지. 젊은 저작자들이 어떻게 자기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지도 유심히 살펴. 그 이유는 나의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야. 글을 읽지 않고,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세상에 뒤지거든.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정보를 읽다 보면 미래 예측도 가능해져요.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해.”
김경희 대표가 인문서적 출판에 평생을 쏟아붓게 만든 사건은 1960년 4·19혁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12년에 걸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기 위해 거리에 나가 데모하다 절친한 친구를 잃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꿈을 일궈내기 위해 가치 있는 지식산업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현재 청와대 자리에 경무대가 있었고 그 입구까지 전차가 다니던 시절이야. 데모하다가 내가 죽었다고 소문이 났어. 하지만 절친한 친구는 총에 맞아 죽고 난 살았지. 경찰에 쫓겨 잠시 피해 있다 다시 데모하러 나왔는데 또 총을 쏜 거야.”
친구의 주검을 뒤로하고 1961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민중서관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4년 동안 근무하면서 참고서, 교과서, 사전 등을 편찬했다. 우리가 학창 시절에 보았던 엣센스 영어사전에서 ‘L’ 항목을 쓴 사람이 바로 김경희다. 이후 직장을 옮겨 을류문화사에서 5년을 근무하다 현재의 지식산업사 전무로 입사했다. 지식산업사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그의 친족형 故 김우정 선생이 설립한 출판사다.
“출판사에 불이 나서 형님이 돌아가시고 직원 7명이 병원에 누웠어. 그 뒤부터 내가 물려받았지. 그때가 1975년이야. 내년 5월 9일이면 지식산업사 설립 40주년이 돼. 인생에는 여러 국면이 있는 것 같아. 내가 지식산업사를 운영하다 1983년에 부도를 냈거든. 11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공부했어. 건강도 좋지 않았었지. 그런데 부도라는 시련이 닥친 거야. 죽고 싶었어. 방에 반쯤 탄 연탄을 갖다 놓으면 서서히 고통 없이 죽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자식들과 함께 죽으려고 했지. 아내한테 ‘당신도 함께 죽겠냐’고 물으니까, 아내는 경상도 출신이거든. ‘죽으려면 혼자 죽으시오, 자식들이 뭔 죄요. 나는 못 죽소’라고 말하더라고. 그 소리를 들으니까 마음이 울컥했어. 다행스럽게도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회사를 살릴 수 있었어. 40여 명의 학자들이 지식산업사 살려야 한다고 후원회를 만들어서 재기할 수 있었소. 변형윤, 민두기, 박경리 선생 같은 분들이야. 그래서 이 회사가 주식회사로 되살아났고, 그 뒤부터 옆길 보지 않고 한길을 걸어왔어. 돈은 없지만 난 행복해요. 나에겐 할 일이 있어. 꼭 해야 할 일이.”
가슴이 찡해왔다. 한 인간의 신념이 어느 한 곳에 매달려 충실과 덕이 될 때는 누구나 격한 과정을 겪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숙명처럼 일을 끌어안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무한한 겸손과 보은이 함께했던 까닭이다.
과연 그의 출판 인생은 어디에 끝을 맺을까?
“5년 단위로 끊어서 생각하고 있어. 5년 하고 다시 건강이 허락한다면 다시 5년을 할 생각이야. 죽는 날까지 계속할 거요.”
부도를 맞은 지식산업사가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은 학자들 때문이었다. 지식산업사가 한국학계에 기여했다는 이유였다. 뜻있는 학자들과 지식산업사 사이에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끈끈한 매듭처럼 얽혀 있어 가능했던 일. 갑자기 구렁이로부터 새끼를 구해준 까치가 나무꾼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전래동화가 생각났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이 서로에게 작용한 것이니라.
지식산업사는 1981년 한국사연구회가 한국사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방향을 제시한 ‘한국사연구입문’을 출판해 사학자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일본의 조선사연구회에서 ‘조선사입문’을 발표한 지 10년 만이었다. 한국사 연구회의 탄생은 한일협정을 반대했던 6·3사태가 계기가 됐다. 1964년 6월 3일 한일 국교정상화 추진을 반대하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4·19이래 최대 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그해 김종필 공화당 의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 간의 한일회담 일정 합의에 반대하는 3·24 시위 이래 본격화된 반정부 시위의 정점이었다. 그 당시 역사학자 200여 명은 ‘굴욕적’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냈었는데, 이때 참가했던 국사학자들은 해방 이후 20여 년 동안 스스로 무엇을 했느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사 전문 연구회 하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전국의 학자들이 모여 한국사연구회를 만들고 논문집을 냈다.
“처음에는 5·16 때 삐라를 만들었던 광명인쇄가 맡았어. 그러다가 보진제 인쇄소를 거쳐 그 이후부터 지식산업사가 내게 됐어. 한국 최초로 이조회화, 추사명품첩 같은 한국미술출판에 성공해서 당시에는 형편이 괜찮은 편이었거든.”
‘한국사연구입문’(제1판)이 나오고 난 뒤 국문학자들이 김 대표를 찾아와 역사학자만 도와주고 “왜 우리는 버리냐”고 따졌다. 그는 ‘감히 요청은 못했지만 바라는 봐요’라며 그 뜻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실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어. 역사학자들도 50여 명이 힘을 합해서 만든 책이었거든. 그런데 80여 명을 동원해서 ‘한국문학연구입문’을 낸 거야.”
이런 국사학자·국문학자들을 위한 뒷바라지가 있어서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 같은 책이 지식산업사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한국문학통사는 문학만이 아니라 국사학, 사상사, 철학 등 각 장르를 감싸 안은 국문학의 총화다. 문학은 역사나 사상이고 철학이라는 판단 아래 그 사회적 성격과 문화적 의미까지 찾아내 기록했다. 이 저서는 흐트러져 있던 국문학사가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고, 세계문학 편제 속에 한국문학을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출판사들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빼앗겼던 우리말과 우리글을 되찾았다는 기쁨에 일시에 수많은 책을 출간했다. 삶의 지혜를 밝혀주는 책에서부터 소설과 역사까지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책을 즐겼고 감사해했다. 우리 민족의 삶과 자존심이 담긴 말과 글이 그토록 귀중한 것인지 뼛속 깊숙이 느꼈던 시대였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 암울한 독재정권이 이어지면서 출판사에는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개인 독재나 총칼로 얻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철저한 사상통제를 가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온의 온상으로 주목을 받았고, 출판사들은 모진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그 시절은 엄혹했어요. 강단에서 마르크스 얘기가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의미로 나오면 정보계 형사가 밖에서 기다렸다가 ‘당신 이런 소리 했지’라고 잡아갔고, 학생들이 맑시즘 강의를 왜 하지 않느냐고 주장하면 반공법, 국가보안법에 걸려 잡혀 들어갔지. 그러다가 70년대 말, 80년대 시절에 학교나 언론사에서 쫓겨난 학생들과 언론인들이 지하에서 소위 ‘금서’라고 불리는, 이른바 사회과학 서적을 발간했어. 리영희, 박현채 같은 이들이 선구자가 됐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리영희 선생의 말씀처럼 좌파, 우파가 공존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때는 사상적 반신불수였어. 왼쪽 날개가 없었지요.”
유신 때에는 출판사 등록도 엄격히 제한됐다. ‘금서’를 내기 위해서는 허가증 있는 사람한테 출판사를 사서 타이틀만 걸어놓고 지하에서 작업을 해야 했다. 그러나 책이 나오면 다퉈서 사갈 정도로 인기는 좋았다. 서점과 인쇄소들이 협력해 수금과 인쇄를 맡아줘 가능했다. 그때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힘을 모았고 동참할 정도로 금서 보급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비판적 출판을 대표할만한 계간지는 창비와 문지가 있었는데. 창비는 좀 더 왼쪽이었고 문지는 좀 더 오른쪽이었어. 이들 계간지는 상징적인 존재였지. 민주화를 주창하는 학자들을 동원해서 계속 글을 발표했기 때문이야. 이런 것들이 모여 6·29를 만든 거지. 출판사에는 창비, 문지, 한길사, 동녘, 사계절 같은 데가 유명했어. 1985년 사계절 출판사 김영종 대표가 감옥에 들어갈 것을 각오하고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냈지. 물론 이 책도 금서가 됐어. 하지만 잘 팔렸어.”
김경희 대표는 평생 좋은 책을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다면 힘든 일. 신념이란 자기 내면의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끌려가다 다른 길로 빠지고 만다. 그에게 있어 출판은 삶의 동력이었고, 신념이 이끌어온 길이었다.
김경희 대표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환경문제에서 찾았다. 권력이나 소유가 아니라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궁극의 지혜가 지구를 보존하는 것에 있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우리가 스스로 망각하는 동안 인류의 욕망,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무분별한 개발이 오히려 지구라는 인간의 터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의 터전을 앗아가고 생명 그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는 우려였다.
“당장 환경문제가 그 어느 문제보다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류가 죽어가는 데 자본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 환경문제를 보면 인류가 블랙홀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이야. 이명박 정부가 대운하를 하겠다고 하는 데, 이것부터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라도 나서야 한다면 데모라도 할 거야. 정파의 문제가 아니야. 대운하는 삼천리금수강산을 망치는 것이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환경문제에 신경을 써야 해요. 60억 인구 각자가 뭔가를 해야 미래가 있어. 그래야 후손이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에 대해 아주 작은 헌신이나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공멸의 길은 멀지 않다.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꼭 그만큼 진실한 대답은 들려올 것이다. 김경희 대표의 바람처럼 우리의 터전을 유지하고 보살피지 않는다면 언젠가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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