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으로 가는 길. 바쁜 일정을 사이에 두고 약속을 정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추려보아도 마감을 앞두고 시간 조절이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와 함께 막걸리라도 한 잔 하면서 지난 일이며, 궁금했던 운동권 ‘야사’에 대해 듣고 싶었지만 이날은 그른 것 같아 찜찜했다. 하지만 이번 안산행은 어딘지 모르게 모험적인 일면이 있어 기운이 솟았다. 그는 밤이나 낮이나 꽉 찬 가슴으로 혁명을 위해 청춘을 바친 ‘조직 활동가’였고, 이제는 ‘화가’로 민중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경기도 안산 원당마을. 홍성담 화가의 작업실은 종이 뭉치와 물감 그릇, 갖가지 미술도구들로 어지럽혀 있었다. 과장하자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뭔가가 잔뜩 있어 가까스로 앉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더럽고 낡은 스피커들. 음악을 꽤 좋아하지 않으면 작업실 내부에 쌓아놓기조차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내가 음악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장르 가리지 않고 음악은 다 좋아한다”며 웃어버렸다.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그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거나 조예가 깊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아주 달고 맛난 그림으로 시를 짓고 이야기한다. 화제와 흥미를 넘어 날카롭고 섬세한 사회성을 모두 품는다. 경탄과 경멸이 뒤섞여 있는 현실에 몸을 담근 채 느끼고 보았던 일들을 기록한다. 홍 화백이 정식으로 화가가 된 것은 故 윤한봉 선생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것은 다양한 형태와 경로가 있다.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 나듯이 단번에 바뀌기도 하고, 쉬지 않고 떨어지는 물방울에 바위가 구멍이 뚫리듯 서서히 변해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겪었다.
대학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조금씩 의식화되다 투철한 운동가를 만나 애벌레가 껍질을 벗듯 과감한 탈피를 했다. 그는 1977년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결핵을 앓고 무안에 있는 요양소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으로 지명수배 받던 윤한봉, 김남주 씨를 만나 사회변혁 운동에 복무하는 문화운동가가 됐다.
이후 요양원에서 나온 그는 백은일, 최열, 박광수씨 등과 함께 ‘광주자유미술인협회’를 결성했다. 이 협회는 독재정권에 반발로 태동한 전국 최초의 민중예술단체였으며, 민중문화운동의 전국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그는 5·18 때 ‘문화선전대’ 로 활동했다. 홍 화백을 설명하자면 ‘5월 광주’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광주항쟁 당시 현장에서 대자보를 써서 붙이고, 플래카드에 구호를 적었다. 난리가 벌어진 광주에는 시민들이 시위를 하고, 외신기자들이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선전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는 광주항쟁에서 “가장 완벽한 세상을 봤다”고 말했다. 그 10일 동안의 기억만으로도 평생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얘기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밥’ 시리즈는 광주항쟁의 잊지 못할 기억 때문에 탄생했다. 첫 발포가 있던 5월 21일 오전 10시. 금남로가 시위대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던 날, 연발 사격 소리가 짧은 간격으로 들려왔다. 매우 작은 소리였다. 사람들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도 광주은행 구 본점이 있던 골목에서 시민들과 함께 숨었다. 거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총 맞은 사람이 있어 두 사람이 낮은 포복으로 데려왔는데, 배에서 피가 콸콸 솟아지고 창자가 함께 끌려왔다. 그는 죽은 이의 몸에서 뭔가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했다. 삭지 않은 보리알이었다. 그는 “아침에 어머니가 해 준 밥을 먹고 그래도 민주화를 만들겠다고 나왔다 분절”한 것을 보고 광주항쟁을 떠올리면 그 보리 밥알만 생각났다.
이날 그는 너무 무서워 뒤돌아 집으로 향하면서 “저 보리 밥알을 심고, 저 시신이 거름이 돼 훌륭한 보리를 키워
황금 들녘을 이루고, 그걸 먹고 우리 후세들이 5월의 진실을 전국화 해야 한다”고 맹세했다. 그는 “그 보리밥알 하나에 절대 고독하면서도 절대 함께 해야만 하는 인간의 존엄성, 그 생명의 사슬이 끊임없이 순환된다는 것, 죽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없으며, 오직 살아서 우리 안에 떠돈다는 것”을 느끼고 ‘밥’ 시리즈를 완성했다. 일반인들은 홍성담 화백의 밥을 김지하 시인의 밥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밥은 절체절명의 그 순간, 피로 지어진 밥이다.
그는 ‘5월 화가’로도 불린다. 감옥에 가기 전에 제작했던 ‘5월 판화’ 연작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돼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홍성담 화가는 ‘통일화가’라는 수식어도 붙어있다. 바로 ‘민족해방운사’ 걸개그림 때문이다. 그는 1989년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후배들과 함께 갑오농민전쟁부터 통일운동까지 ‘민족해방운동사’를 그렸다. 길이가 77m에 이르는 대형 걸개그림이었다. 그는 이 그림의 슬라이드 필름을 미국 교포단을 통해 북한 평양청년학생축전에 보냈다. ‘이 그림은 남쪽 청년학생들이 그린 반쪽의 근현대사이니 북쪽에서 나머지 짝을 그려 완성하기를 바란다’는 편지도 함께 써넣었다. 이 때문에 그는 그해 7월 31일 간첩 협의로 안기부에 끌려가 알몸으로 고문을 당했다. 무려 25일 동안이었다.
몇 번이나 “이젠 내가 죽는구나” 생각하는 순간 다시 살아났고, 계속 고문을 당했다. 그가 고문을 받으면서 “민족과 조국은 배반할 수 있어도 친구는 배반할 수 없다”고 버틴 일화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전설이 됐다. 지금까지 조국의 이름으로, 민족의 이름으로 고문을 참고 견디는 사람은 있었지만 친구의 이름으로 고문을 참고 견디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는 대법원에서 간첩죄에서는 벗어났지만 이적표현물 제작·반포 혐의로 독방에서 3년 4개월을 지냈다. 출감 후 수개월 동안 밥도 삼키지 못하는 위장병에 시달렸고, 밤마다 찾아오는 불면증 때문에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또 섬 출신이지만 물고문의 기억으로 물만 봐도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러한 산고 끝에 ‘물속에서 스무날’ 연작과 ‘식구통’ 연작은 탄생했다. 나는 끔찍한 고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이 작품들을 광주비엔날레에서 직접 봤다. 참으로 힘겨운 그림이었다.
하얗게 빈 캔버스는 화가의 도전장이다. 영혼 속에 창조 본능이 깊이 박혀있지 않으면 선 하나 긋기 무서운 게 ‘하얀 캔버스’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은 배우고 노력하면 얼마만큼 극복할 수 있다. 입시미술도 외워서 그리는 도식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 하지만 진정한 정열이 담긴 그림은 그리는 이의 마음에 좌우된다. 뭔가 강하고 압도된 힘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그 길을 걷기 힘들다. 이는 그림이 단순한 재주가 아니라 삶의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세상이 뭐래도 겁날 것 없고, 세상의 관습과 평판에도 개의치 않으면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수 있으면 된다. 그래서 예술가는 탄생한다.
홍성담 화가는 ‘야스쿠니’에 관한 그림을 발표했다. 그동안 책으로는 꾸준하게 발표됐지만 아직까지 야스쿠니 문제를 다룬 그림이 없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가 야스쿠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가장 험난한 역사를 가진 곳이 한국과 대만, 오키나와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다. 모두 일본의 식민지였고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는 동아시아에서 불안한 상황의 전개는 미국보다 일본의 재무장이라고 판단했고, 그 씨앗이 야스쿠니에 있다고 확신했다. 야스쿠니는 위폐를 봉안한 것에 머무르지 않고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의 정권을 위해 싸우다 죽은 군인들을 군신으로 모시는 하나의 종교라는 이유다. 그의 불안은 마치 예언처럼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일본은 중학교 사회과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 명기하는 본색을 드러냈다. 머지않아 일본의 아이들은 독도를 일본의 보호령, 아니 영토로 색칠하면서 지리를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 깊은 뿌리에는 야스쿠니가 있다. 제국주의는 제국의 주먹과 힘만 믿는다. 식민의 나라에서 생산되는 노동력과 재화를 겁탈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하고,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이 들면 협약 대신 최후의 통첩을 읽어 내려가는 게 제국이다.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의 역사를 아로새기는 한 제국의 야욕은 현재 진행 중일 것이다.
“이제 딱 한 점 남았다. 호텔에서 부탁한 그림이 있어서 중간에 잠시 중지했었다. 처음 야스쿠니 그림을 준비한 것은 5년 전부터다. 작업을 위해 일본의 근현대사와 문화 관련한 책만 100권 넘게 읽었다. 신도(신사)문화의 준 전문가가 됐다. 예술가로서 감성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분석을 한 거다. 이게 내 성격이다. 신사에는 20번도 넘게 갔다. 일본인의 정신 구조는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야스쿠니로 상징되는 과거사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아서다. 일본인들은 언젠가 군국주의가 되살아나면 전쟁터로 나갈 사람들이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 문규현 신부가 글을 쓴 책이 나왔다. ‘그래도 희망입니다’다. 어디에서 많이 듣던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1980년대 노동자 노래단이 불렀던 노래 ‘참사랑’의 가사 중 ‘노동의 꿈과 희망입니다’와 헷갈린 것이었다.
그가 문규현 신부의 책을 내게 된 경위는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규현 신부님은 1989년 걸개그림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 만났다. 신부님이 평양에 간 임수경을 데리고 들어왔을 때다. 감옥 들어가기 전 1985년 격동기 때 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에서 프리랜서로 일했었는데, 그때는 이름만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영세를 받았지만 한 번도 성당에 간 적이 없었다. 4년 전에 결혼하면서부터 가게 됐다. 부인이 가톨릭 신자다. 나는 문규현 신부의 도움으로 세례명을 찾았다.”
감옥에 나온 문 신부는 그에게 ‘언제 책 한 번 만드세’라고 운을 뗐다. 하지만 문 신부가 부안에 들어가 새만금 문제로 일하면서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신부님이 부안에서 신문을 만들었다. ‘부안독립신문’이다. 거기에 한 달에 2번 연재를 했다. 제일 처음 컷을 그린 건 권정생 선생님의 책이었다.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책(초가집이 있던 마을)이다. 그다음 컷이 생활성서사에 나온 이현주 목사의 책(예수와 만난 사람들)이다. 이번이 세 번째 컷이다.”
그는 문 신부와의 작업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다. ‘완벽하게 진행된 컷’이라고 완연한 미소까지 지었다.
“신부님의 글을 한 번도 보지 않고 24컷을 그렸다. 그래서 글 때문에 구속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근데 글과 그림이 너무 잘 맞아떨어져 기분이 좋았다. 원래 글이 상당히 길었다. 근데 현암사에서 축약했다. 글이 살아날 수 있을까 했는데 오히려 장점이 있었다. 군소리 없이 좋았다."
'이야기 > 내가 만난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광훈 대금산조 전승 교육사 - 대금산조 명맥 잇다 (0) | 2022.10.03 |
---|---|
박영철 감독 - 영화 ‘동학, 수운 최제우’, 백성들은 왜 봉기했을까? (0) | 2022.10.02 |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 젊은이들이여, 높은 이상을 가져라! (0) | 2022.10.02 |
우창수 가수 - 할 말이 있으면 노래 만드는 사나이 (0) | 2022.10.02 |
윤문식 배우 - 마당놀이 ‘인간문화재 (0) | 2022.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