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 발랄한 ‘입담’과 능청스러운 ‘애드리브’는 배우 윤문식 씨의 대명사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볼 정도로 괴이쩍은 연기도 민망하거나 쑥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얼굴이 빨개질 만큼 난잡하고 관능적인 농담까지도 윤 씨가 하면 전혀 외설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극에 감칠맛을 더한다.
관객들의 혼을 빼놓는 솜씨도 가히 ‘일품’이다. 맛깔스러운 소리와 익살스러운 행동으로 장중을 쥐락펴락한다. 이야기의 밑천뿐만 아니라 입이 터진 팥 자루 같다. 그가 ‘마당놀이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배우 김성녀 씨도 마당놀이에 대한 그의 감각에 ‘존경’을 표할 정도다.
윤 씨는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 중에 한 명이다 보니 그동안 신문 지면을 채웠던 그의 얘기는 뻔했다. 칭찬 일색이거나 유쾌하고 즐거운 공연 소개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좀 색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푸지고 구성진 노랫가락으로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는 ‘마당놀이’와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른 그가 스스로 풀어내야 할 ‘인생 숙제’에 관한 것이다.
마당놀이는 지난 1981년 군사독재정권 시절 처음 시작된 이래 해마다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공연예술계가 어렵건 말건 마당놀이는 그 토대가 두텁고 깊어 야무진 기세로 전진해왔다. 어지러운 현실을 타개하고 사회전복을 꿈꾸는 민중의 욕망을 꾸밈없이 그려내서다. 하지만 관객들은 마당놀이가 예전 같지 않아 못내 아쉽고 섭섭하다. 해학과 풍자가 가득했던 마당놀이 특유의 맛이 재미 위주로 치우치는 것 같다는 ‘기대’ 비슷한 ‘우려’다.
윤 씨는 “삶은 돼지가 뜨거운 물을 두려워하겠어요”라고 일갈한다.
“독재 정권 시절 마당놀이는 남들이 할 수 없는 말을 했어요. 언로가 막혀 있던 때라 관객들이 마당놀이를 보면서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냈지요. 시대의 갈등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마당놀이의 역할이잖아요.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는 아무리 신랄하게 까발려도 인터넷에서 더 심한 말들이 오고 가다 보니 감각이 무뎌진 것 같아요. 세상이 많이 달라진 거죠.”
마당놀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부조리를 들춰내면서 민중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속 시원하게 굵어주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카타르시스’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뒤 무언가 남는 것이 있었고, 오늘을 살아가는 힘을 주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인터넷’이라는 소통의 장이 열리면서 민중들은 굳이 나서서 해갈의 대상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윤 씨는 변함없이 마당놀이가 가야 할 ‘원칙’과 ‘소신’을 지키고 있다. 옛 민중의 정서를 제대로 살려야 한다는 것. 하지만 최근 연출가와 견해 차이가 생기기 시작해 고민이다.
“옛 것을 제대로 살리고 싶어요. 서까래가 있는 지붕, 장작불이 타오르는 아궁이,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처럼 구수하고 정겨운 정서를 마당놀이에 담고 싶어요. 하지만 연출가는 그런 것에다가 좀 더 예술적이고 현대적인 것들을 가미하고 싶어 해요. 난로가 아니라 스팀이 되려는 거죠. 그의 얘기가 틀리다고 할 수 없어요. 누가 맞다 그르다 할 수 없는 얘기일 거예요. 옛 것이 자꾸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에 지키고 싶은 거니까.”
자극적이고 극단적이며 극명한 개성을 갖지 못하는 예술이 쉽게 잊히는 세상이다. 가진 것 없어도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아낄 줄 알았지만 자기만 아는 세상이 됐다. 윤 씨가 지키려는 것도 이렇게 변해가는 세상을 좀 더 ‘인간적’으로 바꿔보자는 의미일 테다. 그의 이유 있는 ‘거사’를 지켜볼 참이다.
윤문식 씨는 한길을 달려왔다. 이제까지 3천 회에 달하는 공연을 펼쳤지만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몸이 아프다가도 이상하게 사람들이 모인 마당에만 서면 흥이 난다는 것. ‘이춘풍전’에서는 몸이 안 좋아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지기도 했지만 기어코 공연을 끝내고 병원에 실려 갔다. 이 정도의 ‘정신력’이라면 그의 천직이 ‘배우’라고 해도 토를 달만한 사람은 없을 듯싶다. 하지만 그는 배우라는 말보다 광대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광대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서민들과 호흡을 같이한 우리 이웃이라는 것. 그동안 그가 맡은 배역도 양반이나 장군보다 민중을 대변하는 역할이 많았다.
“‘배우’라는 말은 어감이 별로예요. 온실 속의 화초 같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제 얼굴도 방자 같은 역이 더 잘 어울리고요. 실제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도 방자예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초잖아요.”
그는 마당놀이에서 한바탕 질펀하고 놀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고 한다. 바른 얘기, 해야 할 얘기 다 털어놓고 나면 몸이 가뿐하다는 것. 하지만 실제 삶은 그런 것 같지 않다고 웃어버린다.
“마당놀이에서 말한 것처럼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못해요. 적당히 사기 치면서 살고 있는 것 같거든요. 옛날 선비들도 학식이 높고 돈이 많다고 존경받는 것은 아니었어요. 언행일치가 되는 사람이 추앙을 받았죠.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잖아요. 도리어 그런 사람이 존경받고 있으니까요. 참 씁쓸한 일이에요.”
그는 이처럼 모난 세상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해소하는 것이 마당놀이의 생명이라고 지적한다. 마당놀이야말로 인간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모두 깃들어 있다는 생각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탯줄을 마당에서 태웠어요. 마당에서 뛰놀며 자랐고 성장했지요. 곡식을 타작했던 장소도 마당이었고 죽어서 상여가 나가는 곳도 마당이에요. 마당은 삶의 통과의례 같은 곳이에요. 이처럼 마당은 우리가 사는 시간과 장소를 상징해요. 그래서 마당놀이는 현실을 바탕으로 두고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혼만 내는 것은 아니에요. 마당놀이의 진정한 의미는 ‘함께 잘 살아보자’로 귀결되거든요. 한마디로 마당놀이는 인간 본연의 정서를 찾아가는 거죠.”
마당놀이는 왠지 세상의 축소판이자 우리가 꿈꿔가야 할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윤문식 씨가 처음부터 마당놀이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1967년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15년 동안 줄곧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하지만 가슴속에 뭔가 허전한 것이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훌륭한 외국 작품이라도 한국적인 정서를 제대로 담아내기 힘에 부친 까닭이다.
숙고 끝에 그는 연출가 손진책, 배우 김성녀, 김종엽 씨 등과 함께 극단 ‘미추’를 세우고 우리 고유의 연희 장르인 ‘마당놀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81년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작품 ‘허생전’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한국적인 정서’의 위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그는 27년 동안 연극을 계속하면서 마당놀이 무대에 오른다. 예술성 있는 순수 연극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 년에 몇 번 마당놀이 해서 돈을 벌어요. 그 돈으로 다시 예술성 있는 작품을 하죠. 그렇지 않으면 좋은 작품들을 만들 수 없어요. 마당놀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극단 운영에도 많은 도움이 돼요.”
마당놀이는 관객과 호흡을 같이한다. 미리 짜인 대본과 연출은 있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갇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는 “마당놀이는 관객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한 번도 똑같이 공연한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관객이 학생이냐, 아주머니냐, 회사원이냐에 따라 연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아들이라면 누구나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윤문식 씨도 고향과 어머니에 대해 적잖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이 고향인 그는 서산시 홍보대사를 비롯해 충청도를 대표하는 갖가지 타이틀을 달고 활동했다. 그는 이러한 모든 것이 “어머니의 음덕을 입어 일이 잘 풀린 것 같다”고 말한다. 지극한 효심과 성찰이 깃든 얘기다.
“우리 동네에는 과부 30명이 살았어요. 한국전쟁에서 남편들이 다 죽었지요. 그중에서도 우리 집이 가장 가난했어요. 그 당시에는 남편이 죽으면 머리를 풀고 집에서 나오지 못했었지만 어머니는 자식들 끼니 걱정 때문에 아버지가 쓰시던 책상을 시장에 들고나가 장사를 하셨어요. 정말 강한 분이셨죠. 어머니는 소학교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랬지만 어머니께 많은 것을 배웠지요. 특히 사람답게 사는 거요. 6·25 직후라 집집마다 마당에 짚더미를 쌓아놓으면 부모 없는 아이들이 와서 잠을 잤어요. 우리도 살기 힘든 형편이었지만 명절 때가 되면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려와 목욕도 시키고 밥도 챙겨주셨죠. 셰익스피어 햄릿에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강해요. 저는 백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할 거예요.”
그는 농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성적은 좀 열심히 하면 일등도 했고, 좀 논다 싶으면 꼴찌도 했다. 하지만 ‘연기’는 달랐다. 지금의 배우 윤문식이 있는 것도 고교 시절의 ‘남다름’ 때문이다.
“학교에서 일 년에 한 번 ‘소극’이 벌어졌는데 교장선생님께서 제가 연기하는 것을 3년 동안 지켜보시더니 연극을 전공하는 대학에 가보라고 했어요. 이 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팔짝팔짝 뛰었죠. 배우는 미남이나 하는 줄 알고 있던 분이거든요.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고요. 하는 수 없이 집을 나와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일을 했어요. 거기에서 돈을 벌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 뒤로는 별 얘기 없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그의 고향은 바닷가에서 가까웠다. 30분 정도 걸으면 바닷물을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현재 그때 그 바다는 모두 농경지로 변한 상태다. 만져보고 싶어도 만질 수 없는 바다가 돼버렸다. 하지만 그는 “강산이 변한 것보다 인심이 변하는 게 못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춥고 배고팠지만 인정이 넘쳤던 옛날이 그립다는 것. 그는 명절이 되면 고향에 가지 않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세상이 잘못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우리 사회가 ‘종’은 무시하고 모두 ‘횡’으로만 움직이고 있어요. 끼리끼리만 뭉치려고 해요. 아버지가 없으면 어떻게 제가 있겠어요. 날줄과 씨줄이 엮여야 견고한 것처럼 종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우리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어요.”
윤문식 씨는 놀랄만한 재주를 가졌다. 단 한 번에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또 기분 나쁘지 않은 음담패설과 욕설을 던져 좌중을 웃게 만든다. 몸이 따라주질 않은 상태에서도 어떤 자극을 알아차리고 응용해내는 솜씨는 기가 막힐 정도다. 천생 ‘광대’ 체질이다. 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추측이다. 우리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그는 관객들의 반응에 예민하고 재빠르다.
“축구를 보면 1초에 골이 갈리잖아요. 박주형 선수를 보세요. 골을 넣을 때 멈추고 차는 게 아니라 움직이면서 차잖아요. 마당놀이도 순간이에요. 극의 맥을 잡아 이 때다 싶으면 관객들을 허를 찌르는 거죠.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해요.”
타고나기도 했지만 그의 재능은 끊임없는 ‘책읽기’와 ‘사색’로 빛을 발한다. 그와 나란히 앉아 인터뷰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철학에서부터 예술까지 시의 적절한 문구를 적재적소에 인용하는 그의 말솜씨는 박학다식의 경지를 넘어섰다. 마치 사물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결론은 ‘솔직함’에 있었다.
“무대에서 폼 잡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좋죠. 사극을 보면서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리얼리티가 없어서예요. 신라 황실이라면 사투리를 써야죠.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시간 지나면 더 괜찮아질 거예요. 그 게 바로 연기예요.”
윤문식 씨는 아침 토크쇼에 자주 등장해 청산유수와 같은 구담(口談)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가끔은 ‘부적절’한 발언으로 수위를 넘겨 어안이 벙벙하게도 했다. 하지만 아나운서들은 애써 수습하려고 하지 않고 웃으며 넘겨버리고는 했다. 시기나 상황이 적절한 데다 정겹고 구수하기 때문이다. 또 그의 말은 아주 시원한 기분을 선사해 찡찡해 있던 방청객들의 얼굴도 금방 ‘스마일 맨’으로 만들어버렸다. 사나흘을 꼬박 같이 지내더라도 지루할 틈이 없을 것만 같다.
그에게 일상에서도 ‘이 썩을 놈아?’, ‘이런 싸가지없는 놈을 봤나?’라는 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물론”이라면서 “생활이나 연기나 똑같다”고 대답했다. 리허설이 한창인 와중에도 그는 나이 어린 단원들에게 곰살맞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껄껄껄’ 웃을 뿐 얼굴 찌푸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게 욕이 아니라 정이예요. 마당놀이에도 많이 나오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런 말의 골계미를 추구했거든요. 제가 바닷가에서 자란 탓도 있어요. 원래 말이 좀 거칠고 투박해요.”
민담 중에는 익살맞은 말로 양반들을 꾸짖는 골계적인 작품이 많다.
그에게 마당놀이는 생활처럼 느껴진다. 일상을 그대로 무대에 올려도 될 법하다. ‘연기 같은 일상’, ‘일상 같은 연기’라고 해야 할까.
윤문식 씨는 “마당놀이 전용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이 소원이다. 이 극장이 있어야만 마당놀이가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외교사절이 되고, 전통연희를 하는 단체들이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고 강조한다.
“산이 있으니까 올라간다고 하잖아요. 이 말처럼 마당놀이의 발전을 위해서는 꼭 전용극장이 있어야 해요. 서원이 있어 학자가 배출됐던 것처럼 마당놀이도 극장이 있어야 새로운 인재가 탄생할 수 있어요. 앞으로 좋은 후배들이 많이 나와 줬으면 좋겠어요. 근데 요즘 서구 뮤지컬 작품이 유행이잖아요.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연기도, 연출도 없어요. 비디오테이프 틀어놓고 연습하잖아요. 오직 배우의 능력만 있을 뿐이에요. 답답한 현실이에요.”
윤 씨는 마당놀이에 청춘을 바쳤다. 여전히 그는 “눈을 감을 때까지 마당놀이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한다. 아니 그는 죽어도 ‘마당놀이 귀신’으로 살 것 같다.
“문화는 천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관객이에요. 관객들이 관심을 가져야 발전할 수 있어요. 그 나라의 자존심은 문화예요. 문명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문화는 그렇지 않아요. 우리 문화를 천시하지 마세요.”
'이야기 > 내가 만난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경희 지식산업사 대표 - 젊은이들이여, 높은 이상을 가져라! (0) | 2022.10.02 |
---|---|
우창수 가수 - 할 말이 있으면 노래 만드는 사나이 (0) | 2022.10.02 |
김수진 극단 아리랑 연출가 - 우리는 아직까지도 한솥밥을 먹어요 (0) | 2022.09.30 |
이혁준 한국사진사연구소 사진가 - 머릿속에 축적된 느낌을 종합적으로 구현한 풍경사진이에요 (0) | 2022.09.30 |
전순필 우리소리 연구회 ‘솟대’ 대표 - 즐기는 사람한테는 누구도 이기지 못해요 (0) | 2022.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