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우창수 가수 - 할 말이 있으면 노래 만드는 사나이

이동권 2022. 10. 2. 18:24

우창수 가수 ⓒ울산노동뉴스


격렬한 저항의 현장에 거리낌 없이 파고들어 가 고통받는 이들의 외침을 노래로 호소해왔던 가수 우창가 1집 음반을 발매했을 때 그를 만났다. 음악과 함께 했던 세월을 반추해보면 그의 첫 앨범은 너무 늦다. 아니 너무도 긴 세월을 기다렸다.

앨범의 제목은 ‘빵과 서커스’다. 이 제목은 당대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가 로마 제정의 우민 정책을 비꼬았던 말이다. 서커스는 로마 황제가 정치적으로 불만세력이 될 만한 프롤레타리아트(하층 로마 시민)들의 눈요기 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대형 원형경기장의 이름. 이 경기장에서는 ‘벤허’의 전차경주, ‘쿼바디스’의 사자, ‘글레디 에이터’의 검투시합 등이 펼쳐졌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44년 동안 재위하면서 44번의 대규모 서커스를 열었다.

우창수는 월드컵을 비롯해 관이 주도한 수많은 행사를 유베날리스가 말했던 ‘서커스’로 보고 실업자, 철거민, 조합에서 해고된 노동자 등을 통해 바라본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이번 앨범에 담아내고자 했다.


“콘서트와 연극음악작업, 현장공연 등 좀 많이 바빴던 것 같습니다. 10여 년 동안 벼르던 1집 음반을 500여 명이 넘는 후원인들이 제작 지원을 해주셔서 또 다른 대안적 상상력을 가지게 해 주셨네요.”

우창수는 1967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동안 한 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경남 창녕, 밀양, 언양, 울산 등으로 이사를 다녀야만 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이사를 많이 다녔지요. 3~4년씩 근무하다 전근을 가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친구들과 정이 들 만하면 이사를 가고 해서 학교를 옮길 때마다 친구를 사귀는데 시간이 걸렸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교장선생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아이들이 거리감을 느끼거나 친해지기 힘들어하지 않았나 싶어요. 하지만 아이들과 금방 친해지곤 했습니다. 전근 다녔던 학교가 한 학년에 1 학급밖에 없는 시골학교라 한 동네에서 얼굴 보며 놀아야 하니깐 제 나름대로 적응을 했죠.”

그가 말하는 아버지는 ‘호랑이 선생님’이다. 아버지는 무섭기도 했고 권위적인 부분도 많아서 아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한 번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울산시교육청에서 주최하는 그림대회에 사생화 부분으로 나갔다가 교실을 잘못 찾아 정물화를 그려야 했죠. 얼굴이 하얀 도시 아이들이 창문밖에 서있는 학원 선생님이랑 부모님들로부터 코치를 받는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아 이 아이들은 나와 다르구나’라고 생각했죠. 게다가 그림 그리는 방식도 달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제일 먼저 그림을 그리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 그림이 상을 받았어요. 우수상이요. 그 당시에 형이 저한테 그림을 간간히 가르쳐 줬는데 아직도 형이 해준 말이 기억나네요. 그림에는 ‘일등 이등이 없다. 네가 그리고 싶은 데로 그려라’는 말이요. 이 말이 힘이 된 것 같아요. 하지만 상을 받은 이후에도 아버지는 제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주무시고 나면 몰래 그림을 그렸고, 새벽녘에 그림 그린 흔적을 치운 채 잠든 척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림을 참 그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지금도 호심탐탐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죠. 잘 안되지만.”

그림을 좋아했던 어린 우창수는 지금 전업 가수의 길을 걷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기타를 손에 잡은 게 화근(?)이었다.

“처음부터 음악을 직업으로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는 것은 저한테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지요. 형이 클래식 기타를 아주 잘 치셨고 그림도 잘 그리셨어요. 그래서 어릴 때 형과 함께 그림도 그리고 기타를 배웠지요. 트럼펫이나 트롬본을 부는 법도 배웠고요. 그 당시 또래들에 비해 굉장히 빠른 거예요. 하지만 기타는 놀이이면서 생활이었어요. 으레 그렇듯이 자기를 뽐내는 정도였고 휴식이고 놀이였죠. 그런데 고등학교 때 김민기 선생님의 노래가 가지는 의미를 알게 되고 또 다른 구전가요와 저항가요를 접하면서 음악과 노래에 대해 좀 더 진지한 고민을 시작한 것 같아요. 가사 하나하나가 절절했고 진솔했으며 감동이었죠. 그래서 나도 이런 노래를 부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부정한 시대였고 제 자신이 분노할 수 있었으니까요. 노래는 저한테 세상에 대한 발언이기도 하지만 제 자신의 해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직업이 됐지만 전업이냐 아니냐를 떠나면 직업이 아닌 이들도 음악과 노래를 생활 속에서 향유하고 발언하는 이들이 많죠. 그분들도 음악 하는 사람이고요. 자본주의가 이윤을 위해 예술을 상품화하고 향유에 대해서도 왜곡하지만 저는 궁극적으로 예술, 음악은 인간에게서 특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술이 인간 활동 중에 여가의 부분이고 고도의 정신적 활동이라지만 지금은 그 향유의 시간마저도 폭력적으로 강요당하고 빼앗기고 있지 않나요? 등 따습고 배불러야 그래도 예술이 눈에 보이고 한다지만 역설적이게도 배고프고 고통받는 이들이 예술과 더 치열하더군요.”

그는 대학 입학 후 통기타 동아리에 들어가 기타를 쳤다. 말을 빌리자면 ‘멋모르고’ 기타를 들고 다니며 낭만을 즐겼다.

“그 당시 스무 살이면 누구든 한 번쯤 대학가요제를 나가는 꿈이나 통기타에 대한 낭만을 가졌을 겁니다. 저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요. 그래서인지 당시 통기타 동아리는 인기가 많았습니다. 가입오디션에 칠팔십 명이 왔으니까요. 어쨌든 통기타 동아리에서 한 학기 정도는 멋모르고 기타를 들고 다녔고 2년 정도는 동아리 생활을 지속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광주항쟁의 역사적 무게와 6월 항쟁, 노동자대투쟁을 예고하던 시대 아닙니까. 애써 시대정신을 외면한 벗들도 있었지만 점차 저는 수업보다는 시위에 참가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렇게 운동권이 됐습니다. 이후 노래에 대한 고민도 많아졌고 진로에 대한 고민도 많아졌습니다. 내가 불렀던 사랑노래에 대한 또 다른 고민에 술을 먹고 대중가요 책을 불태운 적도 있었고요. 스무 살 즈음의 사고는 분노, 복수, 파괴의 미학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래가 가지는 순기능도 있지만 정치적 대중조작과 만나면 어떻게 역기능을 하는지도 알게 됐고요.”

그때부터 그는 통기타 동아리 성원들을 설득해 대동제 때 가수 김민기의 노래 ‘연이의 일기’를 함께 부르고 집회에 나가 노래했다. 또 풍물을 배우고 공부도 하면서 나중에 졸업하면 문예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웃긴 것은 제가 대중가요를 하던 통기타 동아리 출신이라고 전통이나 다른 민중가요만을 하는 동아리 성원들이 좀 무시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많이들 다르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경직성도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문예운동을 하겠다던 저를 선배들이 굳이 학생회 일을 시키려고 해서 ‘제발 운동도 하고 싶은 것 좀 하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는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한다. 하지만 희망은 깊은 고민을 낳는다.

“정치지망생들이 이 시절을 액세서리처럼 치장시키는 것을 종종 봅니다. 하지만 그 희망이 때론 여전히 묵묵히 자기 갈 길을 가는 분들에게 고통을 장기화시키기도 하죠.”

90년 그는 놀이패 ‘일터’ 입단해 무대에 선다. 그림을 좋아했던 아이가 통기타 동아리에서 노래를 부르다 다시 배우가 된 것이다. 놀이패 ‘일터’는 지금의 노동문화예술단 ‘일터’다. 일터는 87년 노동자 투쟁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합법적으로(?)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문예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처음엔 놀이패 일터를 잘 몰랐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문예운동에 대한 고민과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풍물패 선배의 소개로 90년 6월쯤 일터에 입단하게 됐죠. 처음엔 음악과 관련한 일보다 현장공연을 많이 다니고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좋아 일단은 열심히 해보자고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빠 힘내세요’ ,‘흩어지면 죽는다’, ‘비 오면 비투사 눈 오면 눈투사’, ‘다시 또다시’ 등의 작품에 배우로 참여했다. 너무도 유명한 공연들이라 나도 봤던 기억이 난다.

“일터에서의 현장공연과 노동자들과의 만남은 저한테 다시 세상을 보고 공부하는 계기였습니다. 말하자면 계급으로서의 노동자와 그냥 노동자는 다르다는 것, 생활을 넘어 생존의 현장에서 외쳐지는 원시적인 인간의 문제 등... 이렇게 말씀드리면 대단한 운동의 과정쯤으로 들리겠지만 사실 따지면 노동자들과 술 마시고 노래하고 공연하고 싸우고 한마디로 잘 놀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기간 동안 일터의 운동적 가치와 노력은 지금의 제 말과 다르게 존재합니다. 일터를 처음 창단한 선배들은 대단히 헌신적이고 열정적이신 분들이었습니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어떤 사업장을 이야기하면 그 사업장의 노동형태, 노동자의 구성, 조합의 성향까지 줄줄이 이야기하곤 했는데, 참 대단하다 싶었죠. 작품을 만들 때도 요즘이야 대놓고 인터뷰 좀 하자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때는 인터뷰 이런 것을 현장에 있는 분들이 부끄러워도 하고 간부나 공식적인 자리를 만들면 얘기가 걸러지니까 단원들이 다 전체적으로 술자리를 가지고 밤새 이야기 한 뒤 다음날 들은 얘기들을 정리한 기억도 있네요.”

그가 연극에 관심을 가진 것은 연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극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가치를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연희극과 프로시니엄(proscenium) 무대에 대해 알고 싶었던 그는 극단 새벽의 연극학교에 들어가 4개월간의 과정을 수료하면서 서구의 연극과 우리의 전통연희, 마당극과 야외극 등에 대한 공부를 했다.

“예전에는 현장공연이나 집회에서 그냥 사장 욕만 해도 공감을 얻고 박수를 받았어요.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 가 아니라 내가 잘 못하는 얘기를 배우들이 외쳐주니까 그게 속 시원하고 고맙고 그런 거죠. 가령 ‘흩어지면 죽는다’ 같은 작품은 얼마 전에 일터 20주년 기념공연으로 옛날 선배들이 재공연 했는데 거칠기는 하지만 구성으로나 당대 현장에 대한 문제제기가 잘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는 그 작품이 보이고 들렸던 거죠. 장면 속에 사장과 대결 장면이 나오는데 탈춤을 원형으로 하는 과장된 희화화가 해학과 웃음을 통해 시원함은 줄 수 있어도 디테일한 자기반추와 근본적인 자본주의의 본질을 제기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어요. 투박했던 것이요. 그만큼이 ‘흩어지면 죽는다’의 생명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놀이패 일터에서 활동하면서 극단 형편이 어려워 중간중간에 노래패 강습도 다녔다.

“당시 단체들은 생활이 넉넉지 않아 전통혼례, 강습, 공연 등에 많이 다녔어요. 저는 기타와 노래를 한다는 이유로 노래패 강습을 하게 됐죠. 준비된 강습이라기보다는 새 노래를 먼저 배워서 노동자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겠다는 소박한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강사로서의 역량도 요구되고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어서 연구도 많이 했죠. 강습일지도 나름대로 꼬박꼬박 쓰게 됐고요. 얼마 전에 그때의 노트를 발견하게 됐는데, 그때의 고민이 가득 담겨 있더군요. 일터 단원들 대부분이 풍물패 출신이었고 묘하게도 제 동기들부터 춤, 음악, 미술 등 각각의 지향이 있어 장르별로 역할이 나뉜 것 같습니다.”

1997년 그는 노동법개정투쟁 전국순회공연 ‘전진 마침내 승리’를 마지막으로 일터를 떠나 솔로로 독립한다. 음악을 하고 싶었고, 그런 면에서 일터와 지향이 다른 점이 있어 선택한 길이었다.

“96년 일터에서 내부적으로 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노동운동가인가, 예술가인가에 대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토론이었죠. 꽤 긴 기간을 가지고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노동문화예술단 일터가 뮤지컬도 하고 각자 역할에서 음악도 하고 노래도 하지만 그때는 연극분과 음악분과로 나뉘어 있었고, 독자적으로 자기실현에 대한 고민과 함께 방향성에 대한 각기 다른 견해와 생각이 있었으며, 집단 작업에서 상쇄되었던 개인적 작업에 대한 욕구도 있었습니다. 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서로에 대한 소통이 중요한데 부족하고 미숙했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형성하는 문제는 인간적으로는 쉬운 듯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는 솔로 독립 후 부산 가람아트홀에서 ‘노래야 나오너라’ 창작이야기 공연을 했다. 또 솔로활동 중에도 현장과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강습과 연대공연 등을 꾸준히 하면서 98년 처음으로 소극장 실천무대에서 2주간 라이브 콘서트를 개최했다.

“기존의 음악인들도 잘하지 못하는 소극장 장기공연을 하게 된 것은 음악 하는 벗들과 장기공연을 통해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고 싶었고, 솔로가수로서의 자기 점검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죠.”


2000년에는 민주공원에서 두 번째 콘서트도 열었다.

“음반도 없는 제가 창작곡을 줄기차게 몇 년 불러대니까 듣는 이도 생기고 공연을 찾는 이도 생겼습니다. 연대공연이 가능한 곳이 있다면 부지런히 다니려고 했고 그 와중에 곡도 많이 쓰게 됐습니다.”

그는 반전을 중요한 테마로 노래했지만 노동자나 문예운동의 연대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해 일본에서 공연을 가졌다. 또 부산경남울산 열사정신계승사업회에서 주최하는 ‘고난 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작은음악회’를 여덟 번 정도 연출했으며 ‘문예운동은 현장에서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현장의 노동자들과 ‘노동문화위원회’를 만드는데 애를 썼다. 최근 작품으로는 반전 한일 연대공연 ‘두 개의 시선’과 지율스님의 도롱뇽 소송을 이야기한 ‘그리하여 그들은...’이다. 얼마 전에는 울산의 현장 문예패 분들과 만든 창작뮤지컬 ‘...하여도’의 노래, 작곡을 맡았다.

세월은 쉬 가지 않는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금방’이라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히 치열한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가슴 아프고 눈물 나는 사연, 기운 충천한 추억들로 가득하다.

“개인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현장 동지들과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인간적인 동생들이었던 대우정밀 병역특례 해고자 분들과 함께 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분들 중에 노래패 동지들이 있었는데 몇 년간의 수배 생활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노래연습시간에 빠지지 않고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마음을 나누었죠. 조수원 열사가 생을 버렸을 때는 투쟁을 함께 더 하지 못했던 것에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제 노래가 무엇이건데 아버지 벌 되는 백발의 노동자로부터 고맙다는 진심 어린 인사를 받고 평생을 노동을 통해 삶을 꾸려온 늙은 노동자의 거친 손을 잡고 쳐다본 그 곳곳의 순박한 눈망울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부산지하철 매표소 비정규직 해고자(부지매)분들과 현장문예패분들과 함께 농성장에서 1여 년간 촛불 문화제를 진행했습니다. 이 문화제에서 상급단체의 지침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연대하는 광장정치도 계획해보고, 문화적 상상력도 발휘하고 뭐 이러면서 프로그램을 진행해보려 했는데 저에게는 숙제만 남긴 싸움이었죠. 77일 동안의 울산 과학대 청소용역 분들의 투쟁에도 함께 했는데 합의서 쓰는 날 농성장에서 밤늦게까지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던 기억도 잊을 수 없네요. 부지매 투쟁과 과학대 투쟁의 큰 차이는 연대하는 단위들의 투명한 전술운용과 이후 자발적인 집행이 이루어진 것, 지속적인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연대단위들이 자기 일을 만들어 간데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어쭙잖은 연대조직들의 품앗이적인 연대방문이나 회원확보 같은 무늬만 연대들을 경계하고 연대의 의미를 제대로 만들었던 결과 과학대 투쟁은 승리했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고 연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외롭기도 합니다. 언양의 효정재활병원 간병사분들이나 1년이 넘게 혼자 진주햄의 표적부당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는 양산 공단의 이은아 동지처럼 말입니다.”

단체에서 활동하다 솔로로 독립해 모든 일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상황도 힘들겠지만 가수라는 직업이 주는 무게감도 예사롭지 않을 듯싶다.

“제 노래들은 기존의 집회정서에 잘 맞지 않는 곡들이 많습니다. 지금의 집회공간은 집단적 표출과 분노를 모으는 자리가 많은데 이럴 때는 선곡을 하기가 힘듭니다. 물론 적절한 투쟁가나 익히 알고 있는 노래를 부르면 되지만 마냥 십여 년 전에 불렀던 노래 그대로만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노동자 집회는 ‘임을 위한 행진곡’, ‘철의 노동자’, ‘파업가’ 이 3곡이면 됩니다. ‘비정규직 철폐연대가’는 선택사항이고요. 저는 집회공간이 다양한 상상력으로 채워지길 바랍니다. 위의 얘기는 집회공간에 대한 한정된 문제제기입니다. 하지만 저도 한 사람의 가수이고, 지금도 어려운 상황에서 열심히 노래하며 연대하고 있는 이 시대의 아웃사이더들이 많습니다. 모두 저보다 더 열심이시고 훌륭한 분들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일방적으로 집회나 농성장에서 노래하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대부분 노동현장에 연대하시는 분들은 단순히 노동현장을 자기가 가야 할 시장으로 보지 않습니다. 현장문예일꾼, 문화노동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어떠한 조건과 상황에서 노래하고 있는지 들여다봤으면 좋겠습니다. 자본주의 상업문화와 관료화, 권위주의와의 싸움입니다. 기존의 질서가 문예진흥기금이라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한다면 노동자가 만든 문화예술연대기금이라도 만들어 이들을 지원하고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하게 만드는 노동자대 노동자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는 민중가요 진영에서 보기 드물게 현장에서 함께 투쟁해왔던 가수다. 하지만 그는 민중가수, 노동가수라는 명칭보다 ‘삶을 노래하는 가수’로 불리길 원한다.

“민중가수, 노동가수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획득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노동자들이 싸우는 현장이나 민중대회에서 노래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임하거나 다른 이들이 지칭하는 데 있어 최소한 저 자신은 부담스럽습니다. 통상적으로 쓰이기도 하고 대중가수와 구별 짓기 위해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그런 호칭이 가능하려면 그 사람의 삶과 음악, 또 사람들에게서 부여받는 신뢰 등이 합쳐질 때 가능한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다음에 명장의 칭호처럼 한길을 간 영예로운 이름이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는 ‘삶을 노래하는 가수’ 정도면 족하고 제 묘비명에 ‘세상에 아름다운 노래 하나 심고 간 사람 우창수’ 정도면 아마 행복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박일수 열사의 삶을 보면서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떠올렸다”고 말을 이었다.

“기타리스트가 꿈이었던 고 박일수 열사가 딸아이에 대한 상처와 바람을 위해 조선소 하청 노동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배 만드는 공장에서 그가 겪은 것은 비정규직의 설움과 세상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저 또한 어느 순간에 어느 공장의 하청노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검게 때 묻은 손을 비누로 씻은 뒤 내일의 노동을 위해 잠을 자거나 기타를 만지겠지요. 저는 세상에서 음악이, 예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할 말이 생긴다면 노래를 만들겠지요.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제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라 그럴 겁니다. 저도 평화롭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