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멈은 영감하고 정이 좋았나 보네.”
정 할머니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그 나이에 이혼해서 뭐해”라는 한 할머니의 핀잔 때문이다.
“살아도 사는 게 아녀. 평생 두들겨 맞고 살아봐. 그런 소리 나오나. 문소리만 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술이라도 먹고 들어와 봐. 집안 살림 남아나는 게 있나. 다 때려 갈아엎지.”
옆에 앉아있던 김 할머니는 “스무 살 때 시집와서 종년처럼 살았다”며 “젊었을 때 이혼하지 못해 한이 된다”고 거들었다. 자식들 걱정 때문에 영감이 평생 술 먹고 계집질해도 꾹 참고 살아왔다는 것. 남 할머니도 “참혹한 인생이었지만 자식들에게 해가 될까 봐 이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동병상련했다.
삼십 년 전에 혼자가 된 이 할머니는 “호강에 겨운 소리”라고 되받아쳤다.
“돈 벌어다 준 영감만 옆에 있으면 되지 이혼은 무슨 이혼이여. 남편 병수발에 혼자 애들 시집장가 보내려고 허리가 다 굽었어. 과부 팔자보다 상감 같은 영감 모시는 게 나. 솔직히 남 씨는 이해해. 뭐 하러 맞고 살아. 맞고 사는 게 바보지. 주정뱅이라도 영감 있는 게 삶의 위로여.”
김 할머니는 “인간 취급 안 하는 영감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다”면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이날도 집안 청소도 하지 않고 노인당에 갔다며 한소리 들을지 모른다고 했다. 어제는 영감 허락도 없이 건강식품을 구입해 숨겨 놓고 와 심사도 편하지 않다. 걸리면 여지없이 머리통을 쥐어 박힌다는 것이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입맛도 까다로워 반찬 투정이 심하며 아직까지도 재떨이 가져와라, 물 가져와라 종 부리듯 시켜먹는다고 입술을 씰룩거린다. 이런 영감과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과부 처지만 내세우는 게 꽤나 서운한 눈치다.
이 할머니는 여자 혼자 자식을 키우는 게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일인지 애써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김 할머니가 영 못마땅한 표정이다. 남편이 암으로 죽은 뒤 한 집안의 가장이 돼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온 까닭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아들만 챙기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아내로, 며느리로,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설명하면서 더 이상 말대꾸는 하지 않았다.
남 할머니는 “살아온 나날들이 자꾸 눈앞을 스쳐간다”면서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게 지옥 같다”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인생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애달프고 구슬픈 눈빛이다.
남 할머니는 시집온 날부터 시어머니, 남편,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다. 삯바느질에서부터 식당 종업원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변변한 수입도 없이 무직자로 지내는 남편 때문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돈 못 버는 남편이라고 무시하느냐’며 할머니를 폭행하기 시작했고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 흉기까지 휘둘렀다.
남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도 할아버지의 폭력이 줄어들지 않아 정신적으로 힘이 부친 상태다. 할아버지의 가부장적인 의식이 변하지 않는 데다 할머니에 대한 열등감이 심해 여전히 힘으로만 제압하려고 한다. 심지어 옆집 젊은 부부가 할머니의 신음소리를 듣고 신고해 경찰들이 출동한 경험도 있다.
할머니는 앞으로도 여러 가지 시련이 닥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로 인해 생명의 위협까지도 느끼고 있는 상태다.
자식들은 할머니에게 제발 이혼해서 살아 달라고 부탁한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봐 두렵다는 것. 하지만 할머니는 막내아들이 결혼할 때까지는 어림없다는 반응이다.
남 할머니의 아들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매 맞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면서 “아버지에게 대들며 싸워도 봤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어머니가 이혼하겠다고 결정하면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면서 “힘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보다 당신의 행복을 챙기는 것이 자식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우리 동네 노인당에 다니는 노인 여성들의 이야기다. 이곳에는 기자의 어머니도 가끔 들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대부분 자식들 이야기를 주로 하며 할아버지 흉이 곧잘 화제로 오른다.
할머니들은 각자의 환경에 따라 이혼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때문에 ‘이혼을 해야 되느냐, 마느냐’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 할머니의 경우는 매우 선명했다. 자식들 때문에 극단적인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옳아 보였다. 하지만 남 할머니는 “내가 알아서 할 일”이라면서 자식들이 자신의 삶에 이래라저래라 끼어드는 것이 싫다고 했다. 자신이 죽는 날까지 가정을 지키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며 살고 싶어 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인구 10명 중 1명은 65세 이상 노인이다. 2007년 7월 기준 481만 명으로 총인구의 9.9%를 차지한다. 2026년에는 20.8%가 돼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황혼이혼도 급증하는 추세다. 5년 미만 동거부부의 이혼은 급감한 반면 황혼 이혼 건수는 10년 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에 거부하는 노인 여성이 늘어난 데다 마음만 먹으면 재혼도 가능하며, 경제적 보호도 법제화돼 예전에 비해 이혼 후 여성의 경제적 처지가 나아진 까닭이다.
김흥주 원광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년기에 들어 급격하게 변화하는 성 역할과 권력관계의 재편을 남성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황혼이혼에 대한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보다 근본적인 것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와 문화를 해체하는 것”이라면서 “양성 평등의 부부생활이 건강하고 지속적인 부부생활의 버팀목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자녀가 갈등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물질적 효도보다 더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황혼 이혼이 늘어나면서 황혼 재혼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자식들 눈치 때문’에는 옛말이다.
김 교수는 “남자 쪽은 살림을 맡아 자신을 수발해줄 짝을 구하고, 여자 쪽은 경제력이 있는 남자를 원한다”며 “이렇게 경제력이 재혼의 중요 기준이 되면서, 여기에서 소외되는 대다수 노인들의 박탈감도 더욱 커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사회보장 시스템 마련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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