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은 사람들이 의료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미국에 가서 말도 통하지 않는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국내 의료 수준이 좋지 않고 첨단 의료기들도 도입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최근에는 교포들이 한국을 방문해 의료 서비스를 이용한다. 미국에 비해 의료 기술도 떨어지지 않는 데다 비용이 저렴해서다.
직장인 박 모(51세) 씨는 아들 둘을 미국에 유학을 보낸 기러기 아빠다. 일 년 전부터 둘째 아들이 사랑니 때문에 고통을 호소해왔던 터라 겨울방학 기간에 아들을 불러들였다. 미국은 치료비가 비싸기 때문이다. 게다가 치과는 학생보험이나 일반보험이 적용되지 않아서 보험을 따로 들어야만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박 씨는 “학비로 들어가는 비용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인데 사랑니 하나에 50만 원”이라며 “한국에 들어온 김에 건강검진도 함께 시키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국내에서는 2~3만 원이면 사랑니를 뽑을 수 있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 거주하는 유학생 유모(27세) 씨는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든 병원비 때문에 피임을 해왔지만 실수로 임신을 하게 돼 아이를 낳게 됐다. 학생보험을 연장하지 않아 보험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유 씨는 정기 진료비(1회 1백 불)와 기타 검사비(각각 1백5십~3백 불)로 총 2백여만 원을 지출했다. 하지만 출산이 더 걱정이다. 자연분만은 1천만 원 정도면 가능하지만 제왕절개를 하거나 난산을 하면 2천만 원이 넘는다. 하지만 유 씨는 “한국에서 아이를 낳을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병원비는 걱정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미국시민권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는 어쩔 수 없이 시댁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오하이오주에 거주하는 김모(22세) 씨는 갑자기 일어난 복통 때문에 현기증이 일어 앰뷸런스를 불렀다. 그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위염이 의심돼 내시경 검사를 했다. 며칠 후 그는 집으로 날아온 의료비 청구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진료비가 무려 4백만 원이나 나온 것이다. 그는 “만일을 위해서라도 한국에 가서 정기검진을 꼭 받아야겠다”며 “말만 들었지 직접 당하니까 매우 황당했다”고 말했다. 현대판 고려장 이야기도 간간히 전해온다. 한국에 살던 노모가 미국을 방문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비가 수천만 원이 나왔다. 한국으로 다시 보내 치료를 받게 하든지 아니면 치료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교민들 사이에서는 노인들을 초청하기가 겁난다는 말들이 오갈 정도다.
미국 교민 중 30%가 의료보험이 없다. 간단한 질병은 약으로 해결하지만 수술이 필요한 큰 질병은 의료비가 싼 한국이나 동남아시아로 갈 수밖에 없다. 어렵게 마련한 살림마저도 순식간에 거덜을 내버리는 진료비 때문이다. 의료보험이 없으면 감기에 걸려도 기본 진료비가 10만 원이며, 맹장수술도 1천5백만 원에 이른다.
자궁근종으로 고생하던 40대 후반의 한 여성은 한국에서 1백9십만 원에 수술했다. 미국에서는 1천5백~2천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 수술이다. 40대 후반의 한 남성은 치질 수술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서는 2백만 원이면 수술을 받을 수 있지만 미국에서는 기본이 2천만 원이다.
직장보험에 가입한 교민들도 치료비가 만만치 않아 한국을 방문한다. 고용주가 보너스로 현금 대신 의료비가 싼 한국이나 태국 등으로 메디컬 투어를 권하는 경우도 있었다.
건강검진을 받으려는 교민들도 줄을 서고 있다. 미국에서는 건강검진이 일반화돼 있지 않아 신청절차가 까다롭고, 보험회사에서 혜택을 주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다. 미국 보험회사들은 건강검진을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해 보험료 지급을 꺼린다. 한국에서 5십만 원 정도면 받을 수 있는 종합검진 비용이 미국에서는 2~3백만 원에 달한다.
미국은 돈이 없다고 해서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의료보험이나 정부 보조금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환자에게도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일단 치료하고 수술한다. 그러나 그다음이 문제다. 응급실에 들어가 입원하고 수술을 하면 진료비로 1~2억 원은 우습다.
생활 형편이 어려워 치료비를 내지 못할 경우에는 법원이 중재에 나선다. 환자는 총수입이 얼마고, 총지출이 얼마며, 거주비나 차 유지비 등 기본 생활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계산해 자료를 제시하면 진료비를 분할 납부할 수 있다. 그러나 월에 다만 얼마씩이라도 꼭 갚아야 한다. 그 비용을 빚처럼 평생 안고 가야 하며, 진료비를 완납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만약 병원비로 1억 원이 나오면 월 10만 원씩 100년을 갚아야 한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자랑한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반인들은 보험료가 너무 비싸 첨단 의료 서비스조차 경험하기 힘들다. 이들 중에는 자영업에 종사하는 상당수의 교민들이 포함돼 있다.
미국 의료보험료가 비싼 이유는 의료진들에 대한 처우가 매우 높아서다. 한마디로 의료수가가 높기 때문에 보험도 비싸다. 또 진료비에는 치료에 대한 소송비용까지 포함돼 있다. 이처럼 미국은 첨단 의료서비스와 살인적인 의료비로 유명하지만 건강지표는 OECD국가 중 최하위다. 국민들이 비싼 진료비 때문에 병원에 가지 않아서일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나라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민간의료보험으로 유지된다. 공보험의 개념이 없다. 미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인구는 전체의 25% 정도다. 그중에서 12%는 군인이며, 25%는 시민권이 있는 극빈자, 나머지는 20년간 사회보장세를 납부한 65세 이상의 노인이다. 따라서 전체 인구의 77%는 민간의료보험을 이용해야 한다. 민간보험은 한국처럼 강제적으로 가입돼 똑같은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다. 돈이 많고 건강하면 보험료가 저렴하고 돈 없고 병약하면 비싼 보험료를 내야 한다. 돈이 없으면 굶거나 병에 걸려 죽어라는 식이다. 일반적으로 4인 가족의 의료보험료는 연간 1천2백만 원 정도이다.
미국의 민간의료보험제도는 연속성도 없다. 학교를 졸업하거나 직장을 옮길 때 등 현재 가입된 의료보험이 해지되고 새로운 의료보험을 적용한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도 의료보험이 변경돼 보험료를 더 내는 경우가 생기며, 보험료를 내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비보험 진료비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
미국은 종합병원에도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 주치의 제도로 운영되는 미국은 종합병원을 이용하려면 보험회사가 지정해준 닥터스 오피스(개인병원)의 의사에게 소견서를 받아야 가능하다. 그래서 눈이 아파도 바로 안과에 가지 못한다. 주치의의 소견서가 있어야 가능하며, 보험회사마다 가입돼 있는 병원이 달라 자기가 원하는 병원에는 갈 수 없다. 미국 현지에 있는 의료관광 에이전트와의 전화통화에서도 “미국의 의료 시스템은 매우 불편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재미교포를 포함한 미국인들이 의료관광을 목적으로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메디컬 투어’가 성행하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아시아를 찾았지만 최근에는 건강검진에서부터 치과교정, 라식수술, 심장질환 수술 등 각종 의료시술을 받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
병원 관계자들은 홍보만 제대로 하면 외국인 환자 유치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의료관광 관계자들은 의료서비스 못지않게 관광자원 개발, 통역서비스 제공, 여행일정 관리 등 제반 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인도는 전체 환자 중 15~18% 정도가 외국인이다. 진료비가 미국의 10분의 1가격으로 저렴해 환자 유치가 활발하다. 태국은 맞춤형 고급 서비스로 좋은 이미지를 어필하고 있다. 진료비도 미국의 15~20%인 데다 휴양지로서 관광자원이 뛰어나 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오고 있다.
병원의 국내 영리활동에 대한 반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민족인 재외동포들에게는 질 높은 한국의 의료서비스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서 정책을 마련하고 제반 여건을 갖출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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