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찌푸렸던 하늘을 깨우는 음성이 장구 가락에 실려 들려왔다. 우리소리 연구회 ‘솟대’ 전순필 대표가 장구를 치면서 긴 호흡으로 ‘감탄사’를 읊조리는 소리였다. 마치 들끓는 갖가지 소음 때문에 귀청이 찢어지는 일상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도시인들을 위로하는 의식 같다. 햇볕이 따스하게 흐르는 날, 그림자가 두세 겹으로 늘어나는 저녁 즈음에 듣는다면 더욱 마음이 편안해질 듯싶다. 가을이어서일까. 간간히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도, 말라가는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띄엄띄엄 들려왔다. 우르르 몰려드는 심란한 마음을 한 층 더 가라앉혀 주는 오후다.
“큰 무당이 1년에 한 번 하는 굿이에요. 큰 굿이죠. 88년부터 굿을 배우러 왔다가 지금까지 하게 됐네요.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북한산 가장자리에 위치한 약수암에서 만난 전 대표는 3일 동안 벌어진 굿 때문인지 다소 피로에 지쳐 보였지만 이날의 상황을 상냥하게 설명해주는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강단 있는 말투에서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 마는 당찬 성격이 묻어나기도 했고 낙천적이고 차분하게 말하기를 좋아해 술을 즐겨 마시는 애주가로 보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였던 그는 “어제 술 먹고 쓰러졌다”고 말했다. 아뿔싸. 굿도 굿이지만 피로의 원인은 술이었다.
전 대표는 집회 때마다 풍물을 들고 거리에 나와 두드리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전통 연희예술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전문음악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 춤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굿을 배웠다. 굿이 종합예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전통연희예술과 굿은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진다.
“처음 전문음악단체인 ‘도움소’를 창단한 뒤 단원들 모두 전문 문화인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풍물만으로는 어림없다고 인식했죠. 그래서 다들 전통악기나 춤을 배우러 갔는데 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굿을 배우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6개월이면 다 배우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는 한 선배의 소개로 황해도 만신 최광호 선생을 만난 뒤 무작정 보따리를 싸들고 들어가 함께 기거하면서 굿을 배웠다.
“처음에는 징을 치라고 그러셨어요. 배운 적도 없는데 풍물을 해봤다는 이유로 징을 잡게 됐죠. 얼마 지나지 않아 춤을 춰보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뭐든지 ‘돼야 한다’는 성격이라서 거절하고는 했습니다. 한 번은 같이 술을 먹다 춤을 춰보라고 그래서 술김에 췄더니 ‘추라고 할 때 추지. 그것밖에 못 추느냐’고 호통을 치시더라고요. 그 이후부터 춤을 배우게 됐습니다.”
그는 이후 장구를 치던 할머니가 사고를 당해 다시 장구를 잡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구를 쳐보지 않아 눈앞이 막막했지만 이왕 시작한 거니까 앞만 보고 달려가자는 마음으로 매달렸다.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맘 놓고 굿을 배우기에는 세상이 너무도 시끄러웠다.
“굿을 배우다 2번이나 잘렸어요. 한번은 덕진양행 노조위원장이 분신해 장례를 치를 때까지 싸우다 전화를 드리지 못했는데, 선생님께서 누구한테 보따리 챙겨서 보냈더라고요. 굿하면 이상한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굿은 우리 문화의 뿌리로서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유산이에요. 그나마 요즘은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에요. 사명감은 아니지만 우리 것을 하고 있다는 자존심이 있어요. 굿판 악사를 계속하면서 ‘솟대’ 활동도 해나갈 거예요. 정기 연주회도 하고, CD도 발매하고, 우리 것의 엑기스만을 뽑아서 외국 문을 두드려볼 생각입니다.”
우리소리 연구회 ‘솟대’는 전순필 대표를 포함해 3명으로 구성된 ‘하늘 땅 소리’와 분당에 강습소를 운영하고 있던 ‘분당민속학교’가 96년 조직을 합쳐 구성했다. ‘솟대’라는 이름은 마을을 지켜주었던 솟대의 정신으로 전통문화를 지켜나가고 발전시키자는 의미이다.
그는 10년 넘게 인원 변동 없이 활동하고 있는 팀은 ‘솟대’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 요체가 무엇일까. 그는 “노력하는 사람보다 한 단계 위는 즐기는 사람”이라면서 “즐기는 사람한테는 아무도 이기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일이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에게서 알 수 없는 내공이 느껴진다.
'이야기 > 내가 만난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진 극단 아리랑 연출가 - 우리는 아직까지도 한솥밥을 먹어요 (0) | 2022.09.30 |
---|---|
이혁준 한국사진사연구소 사진가 - 머릿속에 축적된 느낌을 종합적으로 구현한 풍경사진이에요 (0) | 2022.09.30 |
정성모 마술사 - 재미와 행복을 선사하는 꿈의 전령 (0) | 2022.09.30 |
김의광 목인박물관 관장 - 불가사의한 인생이야기를 들려주는 목각인형 (0) | 2022.09.30 |
최소리 음악가 - 아리랑 파티, 난타 뛰어 넘는 신바람 일으킨다 (0) | 2022.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