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뚜껑이 녹슬어 있는 방화수 통이 추연한 기분에 젖게 하는 종묘공원을 지나 대형약국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종로5가를 찾았다. 사진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대안공간 건희에서 이혁준 작가의 개인전 ‘풍경 - 밤과 숲’전이 열리고 있었다.
옛 가옥을 전시장으로 꾸민 이곳은 고풍스러운 듯, 낡은 듯, 고적한 듯 묘한 기운이 군데군데에서 터져 나와 그의 사진과 묘하게 잘 어울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겉모습과 말투가 풍기는 이미지도 차분하고 그윽해 이곳과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뭔가 어두운 것이 한 겹 덧씌워 있는 듯 축축하고 시지근하게 느껴졌다. 사진 속에서 다른 세계와 연결된 통로가 열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고, 거기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리다 축 늘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특히 밤을 주제로 한 작품은 더욱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소리 없는 공포는 더욱 위협적인 법이다. 하늘마저 숨을 멈춘 가운데 사나운 바람이 몰아치면서 말라가는 해바라기 씨 껍데기들을 모두 훑어버릴 것만 같았다. 갑자기 몸이 허옇게 떨려 왔다. 밤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까. 그의 얘기가 궁금했다.
“사진이 좀 어두워 보이세요? 그렇게 보였다면 어쩔 수 없네요. 이번 작업은 어둠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해놓고 보니까 ‘그래도 네 사진 같다’고 사람들이 말하더라고요. 의도는 그렇지 않았는데. 실재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머릿속에 축적된 느낌을 종합적으로 구현한 풍경이에요. 숲이라는 ‘장소’가 주는 이미지보다는 숲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형상화한 거죠. 제 작품이 다른 이들의 작품과 굳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제 작품은 일반적인 풍경사진과는 다른 풍경사진이에요.”
풍경사진은 자연이나 인공의 정경을 찍은 사진이다. 또 추상적인 공간에서 작가의 내면적인 세계를 반영하거나 주관적인 심상을 형상화한 사진도 광의의 의미에서 풍경사진으로 볼 수 있다. 이혁준의 사진도 풍경사진이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회화적이며, 조형적인 감각이 매우 뛰어난 미술작품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은 푸른 나뭇잎들이 서로 얽혀 만들어낸 가상의 숲이다. 디지털 합성으로 만들어낸 이 숲은 대상성이 강한 풍경사진과는 느낌을 달리 한다.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곳이나 멋진 풍경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여행지나 일상에서 찍은 사진의 일부분을 잘라내고 붙여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힘들고 어려운 점은 없었어요. 폐쇄적일지도 모르지만 제 작업을 좋아하고 만족하기 때문이에요. 작업을 하면서 즐기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제 자신이 만족해야만 다른 분들에게 보여줄 수 있고요.”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어렵고 힘든 게 없어 보이지만, 어찌 창작의 고통이 없겠는가. 무엇보다도 작업을 즐기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이지 않나 싶다. 이후에도 인상 깊은 그의 작품을 보게 되길 기대한다.
이혁준 작가는 한국사진사연구소에서 일한다. 그는 이곳에서 한국 사진의 역사를 연구하고 정리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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