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기운이 뒤덮고 있는 도회지 골목길을 지나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감미롭고 은은한 정적이 터져 나왔다.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종구 화백의 마음이 빈 공간을 가득 채우면서 내뿜는 따뜻한 인류애였다. 무기력한 영혼에게 생동하는 기운을 불어넣는 어린아이의 음성처럼 그의 마음은 끈끈하고 아름다웠으며, 더할 나위 없이 소박하고 겸손했다.
“평택 대추리 들녘에서 평화로운 농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주민들은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란 이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작은 바람으로 대추리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도 수많은 민중이 전쟁으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2003년에 들렸을 때는 이렇게까지 깊은 수렁에 빠질 줄 몰랐는데, 전쟁은 한 국가의 삶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이제는 내전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고요.”
이종구 교수는 한바탕 폭격이 끝난 뒤 피눈물로 범벅이 되어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실제로 느껴지는 듯 신중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음성에는 인류의 평화를 송두리째 앗아 가고 있는 미국에 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대추리도, 이라크도 모두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침략전쟁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이 교수는 바쁜 일정 때문에 늦게서야 대추리 벽화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며칠이라도 마을 주민들이 위안을 받고 희망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마음을 추스르면서 강제대집행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대추리 담장에 그림을 그리면서 이 그림들이 미군기지확장을 저지하는데 얼마만큼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벽에 ‘내 땅에서 농사짓고 싶다’라는 구호를 쓰면서 전략적 유연성을 앞세워 평택에 동북아 전진기지를 세우려는 미국에, 미군 기지를 확장해 주려는 정부의 행태에 너무도 소극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이 시대의 문제들을 기록하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대추리 주민들에게는 이 구호는 너무도 절실한 외침이거든요.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 운동적인 것보다는 무엇이 문제인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밝게 웃는 이라크 아이들이 왜 어두운 흑백 사진으로 변했는지를요.”
이종구 교수는 이라크에서 쓰레기에 불과한 물건들을 수습했다. 폭격을 피해 뛰어가다가 벗겨졌을 것만 같은 한 사내의 떨어진 구두창, 구겨진 이라크 산 쉬메르 담배와 부서진 라이터, 펩시콜라 깡통, 빙과 껍질, 편지, 유리파편, 심지어는 미군들이 먹다 버린 군용 비상식량이나 이라크 군 장성의 사진까지 수집했다. 현장에서 채집한 물건들이 전쟁의 아픔을 그려내는데 매우 사실적이고 충실한 증거물이었다.
“이 물건들에는 민중의 상처가 깃들어 있고, 전쟁의 참상이 그대로 담겨 있는 오브제입니다. 국가가 파괴되고 있는 현장이나 전쟁으로 인한 상처들을 회화로 표현했다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형식은 작가가 전달하려는 내용을 위해 필요한 도구일 뿐입니다. 형식에 관계없이 인간의 소중한 가치나 사회적인 문제, 삶 속에서 고민이 되는 문제에는 피하지 않고 맞서겠습니다."
이종구 교수는 차기작으로 백두대간을 계획하고 있다. 국토에 녹아들어 있는 민족, 생태, 역사와 개인의 삶을 통해 세계화라는 명분으로 폄하되고 있는 우리 민족의 뿌리와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겠다는 것. 그는 “예술은 국경이 없지만, 예술가는 국적이 있다”면서 “우리 문화가 서구 문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고 대등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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