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로 정신없이 뒤엉킨 인사동 거리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그림이 있었다. 번화하고 무료하기 짝이 없는 도시의 단면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양이었다. 아니 시간의 흐름만을 감지하는 가로등처럼 냉소적인 표정으로 서있는 인간이었다. 양의 몸을 뒤집어쓴 인간. 보통 이러한 행위는 군중을 향해 뭔가를 호소하는 행위와 무의식적으로 결부돼 있다. 나는 계획도, 약속도 없이 전시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시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심각한 마음 한가운데에서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여러 마리의 양들과 마주해서다. 참으려고 아래턱에 힘을 줘 봐도 입술이 힘없이 떨리며 싱거운 웃음이 계속 터졌다. 이를 어찌할고. 이런 와중에 양들은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나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팔짱을 낀 양은 ‘왜 오셨나요’라고 물었고, 젖꼭지를 드러낸 양은 ‘이성을 찾아라’라고 충고했으며, 하얀 눈빛이 슬퍼 보이는 양은 ‘어서 여기로 몸을 숨겨’라고 수척하게 불렀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했다.
빈 공간을 가로지르며 양들이 뛰어나올 것만 같아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작가를 만나야 했다. 양들과의 거리감을 좁히고, 뭔가 이상야릇해진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이 그림을 그린 작가와 얘기를 나눠야 했다. 또 순교자적인 모습으로만 생각해왔던 양의 이미지를 산산이 깨버린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으며, 저 양들이 바로 작가 본인의 모습은 아닐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는 왜 양을 그렸을까?
“양에 대해 선입견이 있는 것 같았어요. ‘양의 탈을 쓴 인간’, ‘희생양’, ‘순한 양’ 등 양을 비유하는 말이 많잖아요. 실체도 모르면서 적당하게 포장하고 있다는 생각, 겉으로는 착하고 순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에 뭔가 다른 게 있을 것 같았어요. 또 뭔가 새로운 소재가 필요하기도 했어요. 결과물이 잘못 나오더라도 과거의 작업에 얽매이지 않고 풀어낼 이야기 가요.”
그의 몸에서 진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겉보기에도 사람 좋아 보이는 애주가 인상이다.
술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그의 술 냄새는 어쩌면 ‘일상의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는 길을 기꺼이 마다해야 할 인생의 ‘자존심’.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싶은 그의 기질.
“1년 농사를 짓고 수확한 것들이 모두 창고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슬퍼요. 납골당에 들어가는 것처럼요. 그래도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무척 재밌어요. 경제적으로 힘들지만 계속하고 싶어요.”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이동환이라는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열심히 달려간다. 언젠가는 살기 위해 거기로 도망치지 않았던 날을 감사할 플랫폼에 도착하기 위해서.
“동물원 같은 데 가서 6개월 동안 양을 지켜봤어요. 실제로 보니까 북슬북슬한 털 안에 온갖 이물질들이 끼어 있어 매우 더럽더라고요. 머릿속에서는 아름답고 포근하게만 느껴졌는데요. 겉과 달리 먼지 덩어리를 떠안은 채 살아가고 있는 양들을 보니까 제 모습이 떠오르더라고요. 마치 이종교배된 것처럼요. 양 그림을 그리면서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고 싶었는데 결국 ‘내 이야기였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감동을 줄 만한 몇 마디 말에도 제정신을 차리는 경우가 있다. 격한 어조가 아니더라도 머릿속에 총검을 쑥쑥 찔러대는 짤막한 이야기다.
그의 작품은 내 얘기이기도 하다는 진실에서 비껴갈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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