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안치영 전문산악인 - 사람이 변하지 산이 변하겠나

이동권 2022. 9. 29. 20:30

안치영 전문산악인


안치영.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곱창집이었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산악인들이 자주 찾는 종로 6가 ‘우리곱창’집에서 술을 마셨다. 지인은 히말라야 로부체 등정에 나섰던 얘기를 꺼내면서 벽에 걸려 있는 한 장의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 속에는 로부체 정상에서 검게 그을린 한 남자가 곱창집 상호가 적혀 있는 마대자루를 든 채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지인과 함께 로부체 등정에 나섰던 안치영이었다. 지인은 히말라야로 떠나기 전 곱창집 사장님께 금일봉 20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안치영의 정상 퍼포먼스는 일종의 약속이었던 모양이다.

안치영에게서 산이 보인다. 탄탄한 근육, 까무잡잡한 살갗, 군살 없는 몸. 겉모습부터가 산에 많이 다녔을 것 같은 풍모다. 하지만 그에게서 산을 본 진짜 이유는 차분하고 넉넉한 성품 때문이다.

산은 참으로 소박하고 서정적이다. 햇볕에 부서지는 나뭇잎, 기묘하게 솟아오른 암벽들, 그리고 엇갈리듯 부대끼는 봉우리들과 능선을 잉잉거리며 머무는 바람. 산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촉촉하고 편안해진다. 그래 어디에선가 만난 것 같은 느낌. 안치영에게서 그것이 느껴진다.

안치영은 197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마산은 내서단감과 아귀찜으로 유명한 곳. 또 산보다 바다가 가까워 바다를 고향처럼 아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안치영은 어릴 때부터 몸으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갑포 앞바다뿐만 아니라 동네 뒷산을 뛰어놀면서 새파란 유년기를 보냈다.

안치영은 초등학교에서 들어가면서 태권도를 시작했다. 몸이 가볍고 순발력이 좋아 적성에 딱 맞았다. 실력은 나날이 늘어 도민체전에 나가 입상도 했다. 하지만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잠시 미래를 걱정하다 ‘은행원’이 되면 어떨까라는 마음으로 마산상고에 입학했다.

인생의 전환기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안치영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뛰놀던 동네 뒷산을 제대로 타보게 된 것이다. 1994년 마산 산바래산악회에 입회하면서다. 이때부터 안치영은 팔용산을 비롯해 사천, 울산, 밀양 등지의 암벽을 돌아다니면서 기술은 연마했다.

“고등학교 선배의 소개로 산바래산악회에 들어가면서 처음 바위를 배웠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팔용산은 집 뒤에 있는 산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만날 놀러 다니면서 오르던 곳이죠. 산은 해발 328m로 그러게 높지 않습니다. 근데 팔용산에는 상사바위와 해병대 볼더가 있습니다. 마산 지역에서 암벽 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거쳐 가는 곳이죠.”

팔용산 상사바위와 해병대 볼더는 마산 산 사람들이 전국 암벽대회를 휩쓸게 만들었던 원동력이었다. 이곳은 암벽을 타는 실력은 물론 산 사람이 가져야 할 투지를 가르쳤고, 저 멀리 히말라야를 꿈꾸게 만드는 매개 역할을 했다.

안치영은 고등학교 졸업 후 은행에 취직하지 않고 부산에 갔다. 일식당에서 일하면서 요리를 배웠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것보다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 더욱 전망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이때도 산에 대한 욕망은 쉬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는 분이 일식집을 추천을 해주셨어요. 조리사 자격증도 땄죠. 해외에서 일식당을 운영할 계획이라는 얘기를 듣고 미래를 위해 선택한 길이었어요. 근데 산에 가고 싶어 못 견디겠더라고요. 손도 상하고요. 손에 상처가 나면 산에 갈 수 없거든요.”

그러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입대영장이 나왔다. 어떤 면에서는 주방에서 탈출해 산과 만날 수 있는 하나의 터닝 포인트였다.

안치영은 입대하기 전 산악회 친구와 함께 설악산에 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었다. 안치영은 망설이지 않고 홀자 설악산으로 떠났다. 설악산 양폭산장에서 산장지기와 만날 약속 이외에는 아무런 기약도 없었다. 스물한 살 때였다.

“양폭산장에서 산장을 관리하던 분을 만났습니다. 설악산적십자산악구조대 부대장이었고 오랫동안 심마니 하신 분이라서 산을 아주 잘 아는 분이었죠. 그분 도움으로 산장 관리를 대신해주면서 사람이 드문 평일에 설악산 주변을 구석구석 돌아다녔습니다. 설악산 아롱이네도 자주 갔었네요.”

안치영은 산장에서 3개월 동안 생활하다 내려왔다. 혼자라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지 배운 뒤였다. 그러나 그는 설악산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설악산으로 되돌아와 2개월을 보냈다. 무언가에 이끌렸을 터였다. 그때 안치영은 제1회 설악 토왕성폭포 빙벽등반대회에 출전했다. 하지만 꼴찌를 하고 입대를 했다. 토왕성 폭포는 길이가 340m 이상 되는 곳으로, 겨울이 되면 수많은 산사람을 불러 모으고 있다.

안치영은 강원도 양구 2사단 수색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태권도 공인 5단이어서 태권도 교관으로 활약했고, 선수로도 발탁돼서 군인태권도 대회, 강원도 도민체전에 나갔다.

“군 생활을 정말 편하게 했어요. 그래서 상급자들이 억지로 완전 군장을 시켜 뛰게도 하고 얼차려도 줬습니다. 태권도 선수로 뛰었기 때문에 유격훈련도 안 받았거든요. 동기들 사이에 있었던 불만을 좀 없애주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안치영은 제대 후 태권도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범을 했다. 도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업이 시원치 않았고 산의 유혹은 끊이질 않았다. 주중에는 아이들 태권도를 가르치고 주말에야 근교의 산을 찾아가 오랜 갈증을 해갈하는 정도였다.

안치영은 사업을 정리하고 서울에 와 윤길수가 운영하는 신촌 애스토로맨 실내암장에서 트레이너로 일했다. 애스토로맨은 유명한 국내 산악인들이 암벽을 타고 있었다. 201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스포츠클라이밍 월드컵에서 리드 부문 금메달을 땄던 암벽등반선수 김자인도 그곳에서 연습을 했다.

그는 암장 트레이너로 일하면서 실력이 월등하게 좋아졌다. 몇 개월 되지 않아 5.13을 등반한 실력가로 성장했다. 5.13 정도 되면 프로 중에서도 대회에서 우승을 다투는 실력을 갖춘 선수다. 5.9 정도를 완벽하게 선등하면 인수봉과 선인봉의 어지간한 코스는 다 오를 수 있다.

예전에는 5.10이 벽이었다. 하지만 장비가 좋아지고 선수들의 실력도 늘어나면서 5.10벽은 깨졌다. 5.9까지는 운동신경이 좋거나 완력이 세면 어느 정도 연습을 통해 돌파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이 되려면 많은 경험과 체계적인 트레이닝, 재주가 필요하다.

그 당시 안치영은 봔트클럽에 가입해 인수봉과 선인봉을 오르내렸다. 봔트클럽은 1974년 창립된 한국산악역사의 산증인으로, 순수한 알피니즘(alpinism:알프스 산맥의 산에 오르는 일)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히말라야를 꿈꿨다. 암장이 아니라 그토록 꿈꾸던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었다.

2005년 안치영의 행보와 실력을 유심히 지켜보던 선배들은 그를 네팔 로부제 서봉 원정대에 추천했다. 안치영은 한국산악회 멤버들과 함께 떠난 첫 원정에서 정상에 섰다. 6000m급 트레킹 피크였지만 신루트 초등이었고 경사 70도에 이르는 거벽등반이었다.

안치영은 네팔에서 돌아온 뒤 인도로 떠났다. 선배가 운영하는 여행사의 가이드로 나선 길이었다. 지금도 그는 한국산악회 산악기술위원을 맡으면서 여행가이드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딱히 이를 직업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서, 직업을 물어오는 이들에게는 그냥 ‘백수’라고 말한다. 그는 인도 트레킹에서 카라코룸 거벽들을 보며 다음 원정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후 유명산악인 엄홍길과 함께 히말라야 로체샤르 남벽 등반에 나섰다. 그가 처음으로 8000m가 넘는 고지까지 올라간 등반이다. 엄홍길에게도 ‘14+2’의 마지막 봉우리로 매우 중요한 원정이었다. 엄홍길은 2001년 로체샤르에 올랐다가 기상악화로 7,600m에서 포기했다. 2003년에는 8,250m에서 눈사태를 당해 대원 2명을 잃은 뒤 눈물을 머금고 철수했다.

엄홍길은 안치영과 함께 로체샤르 세 번째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안치영은 2800m의 거벽을 올라 8200m까지 진출했지만 8400m 정상을 밟지 못했다. 엄홍길은 눈사태 붕괴 등의 위험으로 커니스(눈처마) 앞에서 철수를 지시했다. 두 번째 도전에서 2명의 대원을 잃은 충격이 컸다.

“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후원을 많이 받아서 돈 걱정, 장비 걱정 안 하고 등반을 했습니다. 이후 다시 일본 유명산악인 다나베 오사무가 이끄는 팀과 함께 로체 남벽에 도전했는데 이때도 8,200까지 갔다 물러섰습니다.”

안치영은 다음 원정으로 중국 쌍교부 헌터피크(5,362m) 북동벽 초등에 나섰다. 이 원정도 날씨가 좋지 않아 정상 밑에서 고개를 떨어뜨려야 했다. 4박 5일 동안 비를 맞으며 나선 강행군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초주검이 돼서 내려왔어요. 비가 오니까 눈이 녹아 미끄러웠지요. 등반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어렵습니다. 정말 죽기 살기로 내려왔습니다. 등산은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에 오르다 보면 스스로 나약해지고 자꾸 등반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내려갈 수 있을까 불안감도 생깁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중간쯤에서 헬리콥터 불러서 탈출하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힘이 부치면 가족들도 떠오르고요. 리더 입장이 되면 좀 더 어려워집니다. 팀원들이 마음을 단단히 먹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을 극복 못하면 패닉 상태가 됩니다.”

2006년 안치영은 다시 히말라야로 떠나 인도 창가방(6864m) 서벽에 도전했다. 이어 2008년 네팔 가우리 상카(7,155m) 서벽 신루트 등반에 나섰고, 2009년 한국 최초로 중국 캉딩 지역의 그로스베너(5,670) 북벽 신루트를 등반했다. 지난 7월에는 키르기즈스탄 악사이 산군 테케토르(4441m) 북동벽을 초등 등정했다.

대부분의 삶을 산에서 보낸 안치영에게 산은 무엇일까?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안겨주었던 산에서 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안치영은 산을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삶’이라고 말한다. 또 자연을 벗하고 산과 친하게 지내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재미. 설렘. 산이 주는 행복감이 있습니다. 내 삶을 비춰 봤을 때 산은 제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가족 다음입니다. 사람이 변하지 산이 변하겠습니까. 내가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있지만 산은 언제나 기다려 줍니다. 그것이 산을 잊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요즘 너무 힘들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연은 사람에게 여유를 줍니다. 자연을 벗 삼아 산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