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이시영 시인,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 MB정권 들어 모든 분야가 퇴보했다

이동권 2022. 9. 27. 20:59

이시영 시인


좋은 일이 있었을까? 이시영 시인의 얼굴에 벌겋게 취기가 올라와 있었다. 이시영 시인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문득 떠올라 물었다. “술을 안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곧장 돌아온 그의 대답은 “내가 왜 술을 싫어해.”였다. 신경숙 소설가가 로열 살루트에서 주는 ‘마크 오브 리스펙트’를 수상한다고 해서 호텔에 갔더니 술을 줘서 한 잔 했다는 설명도 문인답게 덧붙였다.

술 오른 그의 얼굴을 보니 ‘술은 괼 때 걸러야 한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술은 한창 괼 때 걸러야 맛있는 것처럼 일을 할 때는 제때를 놓치지 말라는 의미다. 한국작가회의의 이사장을 맡은 그가 어떤 술을 걸러낼지 궁금하다. 

이시영 시인은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화공보부 현상공모, 월간문학 신인작품에 시가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하지만 그의 삶은 시를 쓰는 작가에 그치지 않았다. 1974년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문인 선언’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고, 같은 해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에 참여해 여러 선배 문인들과 함께 다시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박정희 시절에 겪었던 군부독재정권과의 악연은 전두환 5공으로 이어졌다. 이시영 시인은 1980년 창비 편집장으로 들어가 시인이 아닌 편집자로서 더욱 심한 고초를 당했다. 김지하의 시집을 출간해 안기부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았고, 황석영 시인의 방문기를 계간지에 게재한 뒤 구속까지 됐다. 그러나 그는 23년 동안 창비 편집자로 활동하면서 김용택, 김사인, 곽재구 등 걸출한 시인을 발굴해 한국 문학의 질을 한 단계 높여냈다.

“한국작가회의는 1974년 반독재, 반유신,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출발했다. 거리에서 활동을 주로 했던 전위조직이어서 구속되는 작가도 많았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 이후 대중조직이 되면서 회원들이 급증했고,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회원 중에는 보수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도 있었다. 한국작가회의의 정체성은 큰 대의와 큰 정의를 통해서 지켜나갈 것이다. 특히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있기 때문에 진보적 문인 단체로서 어떤 역할을 꼭 하겠다. 단 회원들의 다양한 개성을 해치지 않은 범주에서다. 이명박 정권 들어 민주주의, 남북관계, 평화, 노동, 복지 등 모든 분야에서 퇴보했다.”

이 이사장은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한 쓴소리도 미루지 않았다. 박근혜 위원장이 아버지 박정희와 선을 분명히 긋고, 정수장학회 문제도 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기념관, 정수장학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박정희의 공을 무시하자는 게 아니다. 박근혜가 아버지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하고 선을 그어야 한다는 거다. 근데 유업을 잇겠다니 말이 되는가. 요즘이 왕정시대인가. 박근혜의 실체는 정수장학회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뻔뻔스럽다. 정수장학회는 박근혜가 대권에 도전할 때 족쇄가 될 것이다.”

정수장학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이름을 한자씩 따서 만든 것으로, 5.16 쿠데타 직후에 설립된 ‘5.16 장학회’가 그 전신이다. 정수장학회는 부산일보 지분 100%, 문화방송 주식 30%를 가지고 있다. 박근혜 위원장은 2005년까지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자신의 비서였던 최필립 씨를 후임 이사장으로 앉히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비판을 받아왔다.

이시영 이사장은 한국작가회의가 ‘일하는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여러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이 서울 출신 문인들을 선양(宣揚)하는 사업이다. 김수영, 염상섭, 현진건, 이상 등 한국 문단의 초석이 됐던 서울 출신 작가들이 많은데도 지방 출신의 작가들에 비해 기억이 안 되고 있어서다.

“근대 문학의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 하지만 변변한 근대문학관 하나 세워지지 않았다. 일본 관광객들이 이상 시인의 고택을 찾아오는데도 그 자리에 문학비조차 없고, 원효로 4가에 가면 박목월 시인의 사택이 있는데 지금 그 자리에는 청노루 빌라가 들어서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의 배경은 청계천이다. 삼각동은 염상섭의 삼대의 무대다. 그런 곳에 비를 세워놓으면 얼마나 좋은가. 도봉구 같은 경우 김수영 비가 있는 곳에 조그맣게 라도 김수영 문학기념관을 세우면 관광객도 유치할 수 있을 것이고, 문화탐방기행 교육기관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욕심내진 않을 것이다. 박태원 문학비 건립부터 추진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