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한상윤 팝 아티스트 - 루이비통 걸치면 사람도 명품이 된다?

이동권 2022. 9. 26. 21:41

한상윤 팝 아티스트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손끝마다 경련이 일고, 자연스럽게 어깨가 들썩거렸다. 누긋누긋한 너털웃음이 지어지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음을 흥분시키고 평정심을 잃게 만드는 이 그림. 도대체 정체가 뭘까. 

한상윤 작가의 그림은 가슴속에 큼직하게 박혀있던 시련 덩어리를 모두 녹여버리는 것처럼 씩씩하고 활기찼다.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쉽게 푹 빠져들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이렇게 순식간에 사람의 마음을 빼앗다니.

한 작가의 작품이 주는 쾌감은 다른 작품이 주는 쾌감과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가슴에는 청량감이 배어들었지만 그 이면에서 느껴지는 어두컴컴함이 묵직한 납덩이처럼 스며들었다. 화려한 색채, 무엇인가를 궁량하는 듯 보이는 주제, 쾌활하다 못해 찔끔 오줌을 지리게 만드는 환락의 이미지들. 생각하면 할수록 조마조마하고, 빠져들수록 나른했다.

그는 '뭔가 개념 없이, 줏대 없이 물질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을 '비통맨'으로 희화했다. 작품의 주제로만 보면 그의 그림은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엄중하게 그려내야 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유달리 가볍고 눈에 띄었다.

'비통맨'은 그가 명품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캐릭터다.

"처음에는 미국의 영웅(슈퍼맨)에 루이비통 옷을 입혔다.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많은 작가들이 미국의 영웅을 작품에 차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돼지를 생각했다. 돼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이다. 사실 내 몸무게가 100kg이 넘게 나간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돼지라고 놀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꿈에 돼지가 나오면 좋아한다."

한상윤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서예를 공부하고, 동양화를 그렸다. 만화까지도 수묵화로 그릴 정도로 동양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 동양화를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선생님이 만화를 권유했다.

동양화에 대한 미련은 대학에 진학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똑같은 이유로 동양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니까 교장 선생님이 일본 유학을 추천했다. 만화를 하려면 일본에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그러나 나는 일반 만화는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정치만화과를 선택했다."

대학에 진학한 그는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만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했다. 정치만화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보다 만화에 어떤 내용을 담아내느냐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20대 초반부터 실기 못지않게 역사와 정치, 공산주의 등을 배우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석사 때에도 풍자만화를 전공했다. 그런데 한계에 부딪치게 됐다. 신사참배나 위안부 문제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터라 진로를 선택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정치 만화를 제대로 표현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한 마디로 정치적인 문제에 좀 얇았다. 그래서 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했다. 그때 든 생각이 만화가 아니라 회화로 인정을 받아야겠다는 것이었고, 그림의 주제로 된장녀와 명품을 떠올리게 됐다. 명품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현대 사회를 꼬집고 싶었던 것이다. 명품에 집착한 나머지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뉴스도 많이 나오지 않았는가."

그의 말투에서 맹목적으로 명품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노골적인 비꼼이 완연했다. 명품을 치감고 있으면 자신도 명품이 되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측은함과 반감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자신은 명품에 대한 욕구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아니 명품을 사보지도, 좋아해 보지도 않았는지 말이다.

"나는 명품을 사보지 못했다. 실제로 사고 싶지도 않다. 루이비통이 없어도 내 자신이 명품이다. 인간이 명품인데 왜 명품이 필요한가. "

한상윤 작가는 일본에서 만화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돌연 한국행을 택했다. 만화를 미술화하기 위한 바람과 궤를 같이 하는 선택이었다. 다시 말하면 동양화에 대한 꿈과 집착이 부른 결과였다.

예상치 못했지만 그는 한국에 와서 별 어려움 없이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래서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고, 정통 미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폄훼하는 이들도 있었다.

"만화를 하는 사람이 그림 쪽으로 넘어와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니까 시선이 곱질 않았다. 머리는 노랗고, 잘 꾸미고 다니고, 그럼에도 그림이 잘 팔리고, 온갖 자리에 초대를 받으니까 이단아라고 생각했고, 그저 이슈화를 잘 시키는 작가라고 판단하며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엄친아'로 생각하기도 했다. 잘 사는 집안의 아들, 고위직에 있는 부모님의 연줄이 그의 성공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재단해버린 것이다. 그는 이 얘기를 듣고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노력에 대해 칭찬은 못해줄 망정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깎아내리려는 사람과 우리 사회의 패턴이 미웠던 것이다.

"대학 다닐 때 아버지 회사가 부도 나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일이 많아서 자는 시간이 두세 시간에 불과할 정도였다. 자존심 접어두고 열심히 일했고, 성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내가 잘 되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한국에서도 팝 아트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하지만 한국적 팝 아트라기보다는 미국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팝 아트가 대부분이다.

"나만의 캐릭터로 승부를 던지고 싶었다. 또 랜시 랭과 다르게 작품으로 승부를 보고 싶었다. 반대로 한국에서도 새로운 팝 아트를 원했고, 내 작품에 호의적이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그림 10점을 전시했는데, 그 그림들이 다 팔렸다."

한상윤 작가의 롤 모델은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다. 그를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추구하는 예술이 그의 예술과 매우 비슷하다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은 무라카미 다카시와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꽃 그림을 보고 비슷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내 그림에 들어간 꽃은 '멍꽃'이다. 이 꽃은 현대인들의 모습, 돼지를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다."

그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고 싶다. '토지'를 쓴 작가 박경리를 뛰어넘는 작가가 되고 싶은 게 그의 소원이다. 여기서 짐짓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자신을 박경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사뭇 경솔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속뜻은 그렇지 않다.

"'토지'는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지만 이미 그 이상을 뛰어넘은 소설이다. 이미 명품이 됐다. 하지만 나는 명품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다. 노벨상을 받아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감내할 것이다. 대중에게 맞춰갈 것이고, 예술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비판도 있을 테지만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면 할 것이다. 나는 꼭 그 길을 걸어서 토지를 뛰어넘는 작가가 될 것이다."

그는 대중과의 소통을 늘리기 위해 인터넷(트윗터 블로그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오프라인 활동과 특강에도 참가하며 인사동, 이태원 등으로 스케치도 나간다. 또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만나서 설명하길 주저하지 않으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좋은 의견이 있으면 꼭 기록하고 참조해서 고칠 수 있도록 마음먹는다.

아울러 그는 예술가로서의 감성을 잃지 않기 위해 많은 시간을 문화생활에 투자한다. 영화도 보고, 뮤지컬이나 콘서트 장에도 자주 찾는다. 이런 것들이 새로운 그림을 창작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란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앞으로도 ‘비통맨’ 시리즈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을 예측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