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박대정 큐레이터 -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때 힘을 갖는 예술

이동권 2022. 9. 26. 21:31

박대정 큐레이터


예술은 인간에게 매우 유익하다. 문학, 음악, 미술, 무용 등 모든 예술은 인간에게 더없는 기쁨과 지혜를 준다. 모든 인간은 예술로 삶의 안식을 얻을 수 있으며, 모든 예술은 인간이 현자가 되는 길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거꾸로 인간은 인류의 지혜와 희로애락을 예술에 담았다. 그래서 예술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왔으며, 그 자체로 지성과 감성, 그리고 힘을 가지고 있다.

 

반면 현대의 예술은 비평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누가, 어떤 의미를 부여했느냐에 따라 예술의 의미와 가치가 달라지고, 가격이 매겨진다. 이런 이유로 예술은 대중과 괴리된 채 특정인들의 학문이나 유희로 전락했고, 현실에서도 위협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됐다. 미술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한국에서의 미술비평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고, 주로 학계의 강단 비평이나 미술가의 전시홍보용으로만 유통되고 있을 뿐이다. ‘미술은 어렵다’라고 푸념하는 대중의 얘기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박대정 큐레이터가 예술의 진정한 역할을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예술을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의 고귀성과 자율성이 결여된 예술비평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박 큐레이터는 미술품의 의미에 천착하는 학계로부터 ‘이단아’로 불리지만, 형식주의와 후기 구조주의 비평에서 벗어난 미술비평을 갈망하는 대중 독자들로부터 ‘자이언트’로 불리는 ‘데이브 히키’의 입을 빌어 말한다. 


“미술품의 가치를 판단할 때 그것의 외양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기준으로 삼으면 미술은 대중을 가르치고 이끌려는 기성 제도의 노예가 되고 만다. 미술의 힘은 구경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린 것이다. 미술품은 보는 즐거움을 줘야 한다.”

언제부터 미술을 인식하고 좋아하게 됐는가? 미술을 애호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애매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은 매우 합당하다. 모든 음식을 먹으면서도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것처럼 모든 예술 중에서도 미술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박대정 큐레이터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미술계로 투신했다. 조형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지만 미술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철학과 미술은 일목 상통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너무도 다른 학문이지 않은가. 박 큐레이터가 미술의 정경과 기질, 그리고 이 특수한 언어에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는 어린 시절 집안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직접적으로 가슴에 와닿았던 어린 시절의 감상과 지식이 성인인 된 이후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부모님께서 아마추어 콜렉터였다. 집안에는 전업 작가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미술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미술계에 노출됐다고 할 수 있다.”


박 큐레이터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이 가지고 있는 섬세한 뉘앙스와 미미한 여운까지 경험했다. 하지만 미술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 못지않게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곤란함도 함께 느껴야 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한 교수님의 작업실에 갔다. 대리석을 동그랗게 깎아 놓은 작품이 있었다. 나에게는 그냥 예쁜 돌멩이로 보였다. 하지만 교수님은 생명의 근원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너무 어려웠다.”


그는 대중과 괴리된 예술, 상업주의의 만연으로 비속화된 미술계에 실망했다. 미술계를 둘러싼 진실을 하나둘씩 보고 들으면서 결코 미술계가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러한 생각은 어른이 될수록 더욱 깊어졌다. 어렸을 때 느꼈던 미술에 대한 반발심이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만큼 부피가 컸기 때문이다.


최근 그가 데이브 히키의 미술비평서, ‘보이지 않는 용’을 번역한 것도 이러한 성장과정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용’은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미국의 문화평론가 데이브 히키의 책이다. 이 책은 아름다움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 미술의 효용을 논한 평론집이다. 

박 큐레이터의 모든 생각들은 히키의 비평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미술에 대한 박대정 큐레이터의 생각을 알기 위해서는 데이브 히키를 알아야 한다. 히키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정의 내릴 수 없다. 누군가의 글을 읽거나 얘기를 들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 전체와 관계를 맺는 광범위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계의 상황은 다르다. 미술은 특정인들의 평가에 좌지우지되고, 일반인들은 이들의 비평을 강요당하고 있다. 


“미술 비평은 작품에 대해 읽어주어서는 안 된다. 아름다움을 정의해서도 안 된다. 평가는 대중에게 맡겨야 하고 비평가는 논쟁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이러한 논쟁이 있어야 예술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기존의 통념에 저항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수단으로 쓰일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예술의 힘을 얘기하자면 미술이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미술에는 엄숙한 종교 교리에서부터 파격적인 성행위까지 거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에, 그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복적이다.”


한국에서 발간되는 미술비평서도 다양하지 않다. 대중이 관심을 갖고 읽을 만한 책이 아니라 미술을 아는 전문가들이 보기에 딱 좋을 만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친절하게 읽어주는 책이 있으면 좋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쪽으로 편중되면 곤란하다. 전문가들의 영역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 대중이 골고루 성취할 수 있도록 다양한 미술서적이 출판돼야 한다.”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의 평가가 가장 많이 엇갈리는 분야는 아무래도 추상화나 노골적인 성행위를 묘사한 작품이 전형적이다. 예를 들면 동성애적인 이미지를 통해 포르노를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 소프’를 들 수 있다. 


메이플 소프는 흑인 남성의 누드와 여성 보디빌더 리사 라이언 등의 사진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주제로 한 작품을 계속 발표하면서 전 세계 미술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메이플 소프의 작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 나는 외설적으로 봤다. 이미지가 주는 충격이 대단했다. 대중도 ‘포르노그래피’라고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놀라지 않았다. 대중에게 예술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를 말한다. 전문가들이 예술의 관점으로 보는 것도 자유지만 대중이 외설로 보는 것도 자유이고, 메이플 소프가 포르노성 이미지를 제작하는 것도 자유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메이플 소프의 작품을 예술로 묶어버리면 서로 말 못 한다. 무식한 게 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충남 서천 비인중학교에 재직 중인 김인규 미술교사가 자신의 누드 사진을 웹사이트에 게재해 긴급체포당했다. 일부 학부모들이 나체 사진을 올린 김 교사를 변태 취급하는 것을 넘어 ‘교육적 악영향’을 이유로 경찰 사이버수사대에 김 교사를 고소한 데서 벌어진 일이다. 박 큐레이터는 이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정부와 보수적인 사람들은 ‘외설’이라고 규정하고 교사를 징계했다. 반대로 전문가들은 이들에게 ‘무식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 누가 됐든지 외설로 보이면 외설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술로 보이면 예술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논쟁거리가 돼야 한다. 징계를 하는 것은 곤란하다. 교육계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징계까지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술을 이해하면서 즐기고 평가하는 일은 정신 건강에 이롭다. 미술을 가까이하다 보면 가슴 쓰린 감상과 비애를 맛보는 일도 더러 생기지만, 미술은 좀 더 리얼하게 자신과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기 때문에 타인을 이해하고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미술전문가들은 작품을 감상하려는 대중에게 계도하려고 든다. 비영리 대안공간을 포함한 갤러리와 미술관, 대학, 출판사 등이 미술을 고급화, 신비화시키면서 대중과 편 가르기를 하고 있다. 데이브 히키는 이들을 ‘치료기관’이라고 명명했다. 


박대정 큐레이터는 치료기관들의 남용과 부작용에 대해 일갈한다. 대중과 함께 해야 할 이들이 오히려 전문가들의 얘기만 유통하고 있기 때문에 미술을 어렵게 만든다는 진단이다. 


“히키는 치료기관들이 권력과 비과세 자금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을 벌여왔지만 이에 대해 비판하는 미술평론가들은 적다고 꼬집었다. 평론가들은 그저 ‘시장의 타락’을 불평하는 것으로 자족했고, 비영리 기관들이 내놓는 특정 작품들에 대해서는 문화적 자선의 한 형태 정도로만 생각해버렸다는 것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미술전문가들이 아름다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미술관용 작품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또 특정 미술가에 대한 교육도 과한 측면이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있지만 교과서에는 피카소, 반 고흐 같은 작가의 얘기만 나온다. 미술에 대한 열망이 뜨거운 것은 좋다. 문제는 열망 자체가 다양하지 않다는 것이다. 파인 아트(Fine Art)를 순수미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순수한 게 뭐가 있느냐. 사실 순수미술은 18세기 근대화의 산물이다. 그 이전에 미술은 대중과 가까이에 있었다. 하지만 순수미술이 등장하면서 미술과 대중은 분리됐다. 학회, 미술관, 비평가들이 생겨나면서 미술에 대한 신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신화가 만들어지면 깨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이 어렵고도 어려운 현대미술을 무작정 외면할 수는 없는 일. 어떻게 하면 현대미술을 쉽게 읽을 수 있을까. 요즘 도슨트(Docentㆍ안내인)의 역할이 주목받는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슨트는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에 대해 설명해주는 사람이다. 


“도슨트가 있으면 미술의 맥락을 잡아주기 때문에 쉽고 편하긴 한데 그 이면에는 상상력을 희생당한다. 전시장에서 혼자서 보고, 상상하고, 호기심을 가져야 하는데 도슨트가 연대기적, 미술사적인 이해만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부작용이 있다. 미술을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정서, 감정, 가슴으로 느끼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큐레이터(curator)는 그 옛날 부자들의 창고지기였다. 창고에 있는 미술품을 관리해주는 하인이었다. 하지만 사회가 발달하면서 큐레이터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전시나 기획 업무를 수행하는 전문 직종이 됐다. 


큐레이터의 대부분은 미술 전공자다. 꼭 그림을 그려야 할 필요는 없지만 미술 관련학과에서 공부해야 업무 적용이 유리하다. 아울러 어휘력과 글쓰기 실력도 무척 중요한 직업이다. 자신이 전시할 작품에 대해 말과 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큐레이터에게는 예술에 대한 전문적 지식뿐만 아니라 관람객들에게 전시 의도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창의력과 논리력, 개인적인 열정과 봉사정신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큐레이터는 이미지로 대중과 소통한다. 큐레이터는 자신의 지식과 개념, 세계관과 가치관을 전시라는 이미지로 보여준다. 미술과 사람을 좋아한다면 권하고 싶은 직업이다. 문자의 힘도 대단하지만 이미지의 힘도 대단하다. 하지만 이미지가 더욱 빠르고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큐레이터는 겉에서 바라보면 매우 지적이고 우아한 이미지다. 하지만 이 세계도 만만치 않은 어려움과 고초가 도사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큐레이터는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갈수록 전망이 매우 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양극화가 매우 뚜렷한 직종이다. 학력 버블도 심하다. 반민주주의적이고 비미술주의적인 부분이 있다. 한국에서는 큐레이터가 아트 딜러의 역할을 겸해서 더욱 그렇다.”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미술계와 미술시장이 특정인들의 주도로 확대되긴 했지만, 미술에 관심을 갖는 일반인들이 많아지면서 미술계와 대중의 소통을 고민하는 사람들도 덩달아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때일수록 박대정 큐레이터가 고민하는 예술의 힘과 아름다움을 가슴속에 깊게 각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미술에 대한 다채로운 논의가 한창인 지금, 미술은 진정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