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한상대 한국 5대 국새 장인 - 주류 언론에 명장 이야기가 없는 이유

이동권 2022. 9. 26. 22:27

한상대 대한민국 5대 국새 장인


정부가 새롭게 제작한 4대 국새가 '가짜'로 밝혀지면서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국새의 위엄과 존귀를 한 방에 무너뜨린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온 국민의 관심을 국새에만 쏠리게 했다. 국새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조차 국가의 이미지가 실추된 이 사건을 두고 혀를 끌끌 차게 만들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국새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다.

한바탕의 소란 뒤에 새로운 국새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국새 제작은 이전과 달랐다. 4대 국새 장인의 '사기' 행각이 새로운 5대 국새 제작의 투명성을 보장하게 만들었다. 5대 국새 디자인 공모에는 실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 대학 교수, 인간문화재, 유명 작가 등 우리나라의 쟁쟁한 실력가들뿐만 아니라 명예보다는 자신의 작업에만 열중하던 실력자들도 대거 공모했다. '투명성', '공정성'이 보장된다면 한 번 겨뤄볼 만하다는 이유였다.

이변이었다. 숱한 유명 인사들을 물리치고 무명에 가까운 한상대 씨가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5대 국새 장인이 됐다. 한 씨는 한 쌍의 봉황을 구름을 내딛고 앉아 있는 듯, 부드럽지만 역동적인 선으로 형상화해 국새 인뉴(손잡이) 부분의 당선자가 됐다. 특히 한 씨는 작품에 실재 적용이 가능한 ‘디테일’을 선보여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고, 만개한 무궁화의 꽃술 같은 부분은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평가도 받았다.

한 씨는 자신이 5대 국새 장인으로 선출된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그의 얘기는 문화계에 팽배한 소위 '인맥주의'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또 주류 언론들이 왜 그의 얘기를 다루지 않았는지 조금은 '감'이 왔다.

"국가적인 대사에 참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했다. 대학교수, 인간문화재, 지명도 높은 분들이 얼마나 많으냐. 그런데도 내 작품이 인정을 받은 것 같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 한편으로는 4대 국새 장인을 뽑을 때 문제가 생겨 이번에는 이름을 전부 가리고 예술성과 작품성만으로 심사했다고 한다. 혹시 그래서 내가 5대 국새 장인이 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본다."

국새는 장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장인 중에서도 장인, 최고의 재료와 최고의 기술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국보급 유물이다. 한상대 씨가 국새 장인이 된 것은 그의 예술적 감각과 기술을 공증 받은 셈. 이에 대해 그는 스스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까.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이론은 잘 알지만 실기에 약하거나 그 반대인 명인들이 많았다. 나는 이론 공부도 했지만 현장에서 20년 넘게 실무를 해온 사람이다. 그것이 먹혔다고 본다."

한 씨는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하면서 조각에 대한 이론과 실기를 배웠다. 하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장인들보다 기능이 딸린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한 씨는 곧장 어느 누구도 추천하지 않은 일을 감행했다. 현장으로 뛰어들어 혹독한 수련을 받았다. 그 당시 장인들이 많은 현장에서는 경력을 우선시 해 대졸자를 인정하지 않았고, 대졸자들은 기술자들을 아래로 보는 것이 그 바닥의 정서였다. 그래서 한 씨 같은 대졸자들이 현장에 가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론을 겸비한 장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현장에 뛰어들었다. 세공, 대공, 정밀주조, 보석가공 등 전통기법을 완벽하게 터득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경험을 쌓았다. 처음 현장에 갔을 때 설움을 많이 당했다. 대학 나온 사람이 기술을 배우러 왔다는 이유였다. 하루는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 교수님께 고통을 토로한 적도 있었다.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해야 한다'고 일러주셨다."

한 씨는 그 뒤로 나이 어린 기술자들의 괴롭힘에 개의치 않았다. 괴롭힘의 수준은 '왕따'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일 하는 것에는 빈틈이 없었고, 놀림 또한 달갑게 받아들였다. 연마하고 세공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변용했다. 오직 장인이 돼야 한다는 일념 하나였다. 이런 습관은 그에게 입체를 감각적으로 빨리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지방 출신인 한 씨는 서울에 거의 무일푼으로 올라왔다. 집안에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고, 손을 벌릴 형편도 아니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밥 굶는 것을 밥 먹듯이 했다. 그래도 장인이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것이 밥 먹는 것이었고, 잘 곳이 없어서 박스를 깔고 자도 그것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다. 돌아보니 가슴이 참으로 먹먹하다. 그 힘든 시절을 어떻게 보내왔는지. 고생한 일은 말로는 다 못한다. "

한 씨는 현장 기술을 완벽하게 체득하고,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로 방송국에서 소품으로 사용하는 장식품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방송사를 가리지 않고, 최근 몇 년 동안 그의 손을 타지 않은 소품이 없을 정도다. 주몽, 선덕여왕, 동이, 이산 등 유명 드라마에서 쓰인 왕관, 비녀, 귀걸이, 검 등이 그가 만든 장식품이다. 이러한 실무 경험은 한 씨가 5대 국새 장인으로 선정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다른 사람과 달리 국새 또한 궁중에서 쓰였던 물건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매우 다루기 쉬운 소재였다.

이제 그는 5대 국새 장인이다. 그래서 방송국들은 더 이상 그에게 일을 맡기지 못할 듯싶다. 작가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비용도 늘어나고, 장인의 손을 탄 작품이 소모품 취급을 받을 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에게 다른 소일거리가 생길 것이다. 좀더 차원이 다른 그 무엇이.

모든 미술 작품이 그렇지만 국새는 조형성과 창작성이 실용적인 면과 함께 강조돼야 한다. 또한 국가의 보물답게 국새에서 품어나는 전통성도 뛰어나야 한다.

한 씨는 봉황에 무궁화와 태극문양을 넣어 나라의 발전과 국운융성, 국민의 화합과 태평성대의 의미를 담았다. 또 봉황의 전통적인 모습과 꼬리, 깃털을 응용해 조형적인 이미지를 부각했다. 그리고 여기에 현장에서 배운 기술과 노하우를 적용시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이론이나 명성에만 의존하는 대학교수들의 작품과는 궤를 달리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그의 봉황이 5대 국새로 선정된 이유다. 이론과 현장 실무가 결합해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국새 모형의 선을 봐라. 선 하나에 보통 3시간 이상을 매달려서 조각을 한다.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선을 스케치하고 이를 다시 조각으로 담아내는 과정인데, 선 그리는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이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선이 만들어지고 그려진다. 국새 또한 그렇게 작업한 것이다. 입체의 선은 평면과 다르다. 여러 면에서 봐도 전체 이미지를 균형감 있게 살리려면 선이 중요하다. 조각은 완성품이 만들어지는 것을 감안해서 구상해야 하고, 전후좌우가 모두 아름다워야 한다."

한 씨의 설명과 같이 국새에 조각된 봉황은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날개와 꼬리 끝까지 한 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선들이 서로 조화롭게 뭉쳐 하나의 정교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5대 국새로 한상대 씨의 작품을 뽑은 심사위원들의 평가다.

봉황의 형태는 기존에 알려진 봉황 문양이나 표현을 참조했지만 제작자 나름대로의 변화와 강조를 적절히 조화시킨 조형성도 잘 표현되었음. 특히 쌍봉(雙鳳)의 자세, 날개와 꼬리 부분을 역동성 있게 조각하여 힘 있고 단정하면서도 웅건한 봉황의 느낌을 충실히 표현함. 여기에 쌍봉의 등위로 표현된 만개된 무궁화는 기존의 국새에서 다뤄졌던 상징적 표현에서 벗어나 활짝 핀 구체적인 형태로 국운의 기상을 잘 상징하고 있다고 판단됨. '전체적으로 조각 기술이 섬세하며, 안정적인 자세의 봉황과 적절히 조화된 생략과 강조의 부분이 잘 표현되어 국새 인뉴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됨.

한 씨의 봉황을 직접 보면 탄성부터 나온다. 이것이 바로 ‘5대 국새인가’라는 신기함과 함께 두툼한 듯, 날렵한 듯 미려하게 빠진 봉황의 자태 때문이다.

한상대 씨는 52살이 되기까지 매우 평범한 길을 걸었다. 적당히 인정받고, 적당히 돈벌이를 하고, 적당히 만족하는 삶이었다.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수상도 하고, 심사위원도 해보고, 이봉주 마라톤화와 월드컵트로피 금형도 제작했지만 그의 명성은 고만고만했다. 하지만 이번에 5대 국새 장인이 되면서 그의 삶이 조금은 달라질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당대 최고의 장인 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명예를 그가 획득했기 때문이다.

"국새 만드는 사람에게 국가에서 500만원 줬다. 나라 망신이다. 그 위상에 걸맞게 책정해야 한다. 내가 돈을 더 받겠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장인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