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지 않았다. 설레어 움직이지도, 뭔가 강한 기운에 지배되지도 않았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가 멈추고, 요동치던 우레 소리와 번갯불이 순식간에 사그라진 하늘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욕망의 움직임이 멈추고, 빈부의 격차가 중요하지 않으며, 삶의 척도가 물질이 아닌 세상. 오직 거기에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 ‘유토피아’가 있었다.
우무길 작가의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지상 최대의 낙원’이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낙원의 모습, 즉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에덴의 동산처럼 녹색으로 우거진 곳이 아니다. 직선과 네모, 갖가지 공간들이 필요에 의해 디자인(설계)된 미래 도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최첨단의 도시다.
“미래로 갈수록 도시가 정리된다. 적절하게 가난할 때 공해가 더 많듯이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 더 깨끗하고 합리적인 공간을 찾게 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반대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과연 그렇게 변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나는 내 작품에서 그런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완벽’한 도시였다. 문명의 품에 완전하게 동화돼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세상, 그냥 그곳에서 몸을 맡기면 되는 사회다. 그렇다고 유토피아가 ‘물질’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곳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회, 멋지고 아늑한 세계라 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주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세상이기도 했다.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으면서 스스로 구속되고,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스스로 돕는,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는 지극히 이뤄질 수 없는 극한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회다.
“사람이나 건물이 서로를 힘들지 않게 하는 것, 주지 않아도 받지 않아도 되는 것, 각자가 독립적으로 걸어갈 수 있는 세상을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의식적으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회다.”
사실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수 없는 ‘아이러니 덩어리’다. 먹고사는 문제에 연연하다 보면 방랑자나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고, 훌륭한 시인으로 살기 원하면서 건강한 사람이 되기 어려우며, 순종과 굴종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 세상을 진일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한 잔 술로 감정을 상하기도 하고, 슬픔을 견뎌내기도 하듯이 우리가 사는 사회는 기쁨과 아름다움을 긍정한다면 슬픔과 더러운 것도 긍정해야 하는 곳. 따라서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어쩌면 가장 평화롭고 우아한 세상, 진정한 유토피아라 할 수 있겠다. 결국 그가 이상향과 현실계를 오가며 도달한 결론은 ‘신구가 조화되는 도시’다.
“빈부의 문제, 신도시가 부서지고 세워지는 과정을 보면서, 무조건 버리고 무조건 짓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상적인 도시로 고대와 현대가 절충하는 도시가 좋을 듯싶다.”
우무길 작가는 ‘유연’한 사유로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창조해낸 것처럼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도 매우 ‘플렉시블’하다. 특히 재료에 대해서는 흡수력이 빠르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도 적용한다. 예를 들면 부드럽고 잘 휘는 포맥스의 성질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표면이 거칠게 보이도록 칠을 해서 회화적이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
“재료의 선택에 자유롭다.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새로운 재료를 사용할 의향도 있다. 질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재료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작품에 사용한 주재료는 포맥스다. 예전에 했던 철 작업보다 가볍고, 칠이 잘 되고, 두께 조정이 쉽다.”
실제 그의 작품은 재료만 변한 것이 아니라 형태나 내용 또한 매우 달라졌다. 그의 전작 ‘공작도시’는 1960년대 미니멀아트의 대표 주자, 프랑크 스텔라의 작품을 보는 듯했다. 화려한 색채와 형태, 비정형적인 구성, 조형에 가까운 작품으로 회화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까지 모두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화가 장 뒤뷔페를 꺼내놓았다. 생각해보니 프랑크 스텔라보다는 장 뒤뷔페의 작품이 훨씬 유사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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