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듯했다. 종일토록 어딘가를 쏘다니고 이리저리 배회하는 여인. 조용히 앉아 고독을 집어삼키면서 석고처럼 굳어 있는 여인. 가야 할 길을 완전히 잃어버린 여인. 이 여인은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여인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도 강렬하게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그림 속의 여인은 머리가 없었다. 팔다리도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붙어 있었다. 흡사 돌연변이, 외계 생명체를 보는 것 같았다. 또 이 여인은 영화 ‘엘리펀트 맨’의 존 메릭을 떠올리게 했다. 선천적 다발성 신경섬유종증이라는 희귀병으로 무서운 외형을 갖게 된 사람. 수많은 사람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학대받으면서 하루하루를 끔찍하게 연명해 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 계속해서 교차됐다.
갑자기 이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듯 어지러웠다. 이해하지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최영빈 작가는 그림 속의 여인과 달리 여유로웠다.
“신체의 표현 자체가 하나의 언어 수단처럼 느껴진다. 실제 몸이 잘리고, 피가 나오는 것들을 그리기 보다는 말로 어떤 느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듯이 그것을 대신해주는 몸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신체적으로 느낄 것이다.”
그러나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은밀하게 숨어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평화로울 순 없다. 분명 개인적으로 아픔이나 상처가 있을 것이다. 아니 이겨낸 것일까? 무한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질문과 응답, 최 작가에 대한 반문의 유희가 계속된다.
“상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작업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냐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단 내가 생각하기에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 내가 선택했던 방법이 나를 고립시켰고, 그 사건을 끊임없이 되살리게 했다. 그러면서 심리적인 것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됐다. 그래서 사람의 심리적인 풍경을 그리고 싶었다. 정말 행복하거나 기쁜 순간을 그리기보다는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점, 쉽게 넘기지 못할 순간들을 작업의 소재로 쓰게 됐다. 내 그림은 그러한 시간을 이겨낸 순간이나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어떻게 보면 평정을 찾는 순간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림 속의 여인은 ‘사회부적응자’, 보편적이지 않고 평범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 같았다. 아니면 어느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비밀을 갈망하면서 자기 영혼에 상처를 받은 사람 같기도 했다. 보통은 한정된 시간 속에서 영혼의 깊이를 하나씩 가늠해보지만 이 여인은 늘 그 안에서 심연과 같은 공포와 그 끝을 알지 못하는 고통에 빠져있는 듯싶었다.
“보편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히 큰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고, 말을 더욱 적게 하면서 이미지로 나를 표현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어쩌면 그림에서 머리를 없앤다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실 얼굴의 표정은 직접적으로 구체적이지만 머리가 없어지면 사람에게 말하기보다는 추상에 가까운 표현이 되는 것 같다.”
겉모습이 주는 선입견이었을까. 우리가 ‘보편’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틀에 갇혀 생각하는 편견에 불과했을까.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됐고,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그림은 더욱더 현실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모해간다.
최영빈 작가의 그림에는 작가 자신이 등장한다. 자신의 모든 사유의 세계, 혹은 모든 현실의 상황을 지켜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때론 슬프고 때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안에 깊숙이 파고들어 갈증을 풀고, 몸부림치듯 떨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이러한 기법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대상으로 놓고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그것이 화면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났으면 했다. 또 그려진 형상과 작가인 나와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액자식 구성의 소설과 비슷한 장면이 될 수도 있는데, 거리감 같은 것도 보여주고 싶었다.
무수한 파편으로 흩어지는 아픔에 전율하고, 다시 산산이 부서진 이름으로 되돌아온 공허. 하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 대신 찾아왔던 안정과 평화. 이러한 충격을 경험하게 해주었던 최 작가가 앞으로 희구하는 예술세계는 무엇일까.
“그동안 큰 틀 위에서 내가 주제로 삼은 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는데, 다음에는 조금 더 정체성의 문제, 여성에 대해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유학 준비를 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내 작품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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