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우러나온 이미지였다. 허름한 주머니를 뒤적이다 아주 오래된 무언가를 꺼내놓으면서 쉬게 되는 한숨. 그저 그렇고 그런 일상을 되돌아보면서 회한에 젖을 만한 이미지였다. 또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가 있을 듯싶었다. 갖가지 상황들이 갈피를 잡기 어려울 만큼 얽혀 복잡거리고 혼란스럽게 보였다.
“개인적이지만 누구나 많이 겪었을 얘기를 소재로 사용했다. 작품은 집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이 재개발되면서 사라졌다. 살 때는 소중함을 몰랐는데,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안타까움을 느꼈고, 그때부터 사라진 공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사라진 것은 공간뿐만이 아니다. 시간, 기억, 죽음을 맞은 사람들, 아주 다양하다. 그것을 복원하는 것이 내 작업이다.”
이혜인 작가를 만났다. 기나긴 시간 전시를 준비하면서 찾아든 고단이 얼굴 곳곳에 묻어 있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밝았다. 신물이 나는 창작의 고통, 그것을 즐거움으로 변용해내는 재주가 그에게는 있어보였다.
처음 이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심장이 쉴 새 없이 뛰었다. 이런 그림,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었고,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목을 조여 오는 듯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몇 번이고 쪼그리고 앉아 그림들을 생각했다. ‘작가는 왜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일까’ ‘그의 정신세계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도무지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내 작품에서 거칠고 황량한 느낌이 나는 것은 많은 색을 쓰고, 물감이 뭉개져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포크레인이나 불도저의 강력한 힘에 무기력하게 파헤쳐지는 공간을 생각해서다. 또 사진이나 이미지를 보면서 그리지 않고 상상하면서 표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그에게 궁금했던 것은 메시지였다. 그의 작품은 현대 사회의 물질화와 자본주의의 비천함을 물씬 풍겼다. 그래서 그가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구현하기 위한 소명의식으로 무장한 투사 같아 보였다. 어떤 면에서는 개인적인 상처도 있을 듯싶었다. 누군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사실을 그림이라는 매개로 풀어내고 삭혀가는 듯했다.
“그림에 사회적으로 강한 메시지를 담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메시지가 담겨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 그림이 현대사회의 구조 안에서 하찮은 것, 무시당하는 것, 버려진 것, 사소한 것, 즉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다 보니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런 종류의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한 인간이 태어나 죽어가는 과정이 컨베이어 벨트 위로 펼쳐지는 그림이다. 인간이 밀가루 반죽처럼 만들어지고 음식물 쓰레기처럼 부서지는 그림.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생성과 성장과 소멸의 과정은 왠지모를 공허감에 빠지게 했고, 삶은 혼자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했다.
“죽음에 대한 특별한 경험은 없다.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면 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일 것이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내가 겪지 못한 과거의 시간, 문화, 뭔가 소중한 가치와 단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품에 할아버지가 많이 등장한다. 그 작품에 있는 공장도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목공소다.”
‘소소한 생각’, ‘유쾌한 놀이’, ‘단란한 가족애’ 등 갖가지 유년 시절의 추억이 묻어 있는 공간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는 드물다. 기억 속에서나 아련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도시 개발 때문이다. 그녀는 관람객들이 이러한 사실에 주목해주질 바란다. 자신의 그림을 보면서 그때 그 장소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 아울러 주변 풍경에 대한 기억을 넘어 마음껏 상상하고, 떠올리면서 가슴 한편에 묻어두었던 감성을 끄집어내길 원한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진정성을 담아내기 위해 옛 추억이 남아있는 곳에 집을 짓고 2달 동안 기거하면서 작업했다.
“과거의 공간으로 돌아가 내가 느꼈던 감정도 관람객들이 느꼈으면 한다. 또 내가 그곳에 간 것은 특별한 목적이 없으면 하지 않을 행동이다. 경제적인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기도 했다. 내 그림에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읽었다면 감사하다. 하지만 감성적으로도 느껴주셨으면 한다.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느낄 수 없는 감동, 치유가 되는 것 같은 시간을 가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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