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내가 만난 사람

이인철 화가 - 좌우지간 지금 이 세상 이 모습은 정말 아니다

이동권 2022. 9. 26. 15:18

이인철 작가


생활에 얽매인 채 메마른 감정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은 매우 슬프다. 아주 작은 것에서 찾는 고조된 감정, 바쁜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여유, 돈과 상품을 마음으로 변용하는 용기, 한 번 사는 세상에 대한 참다운 인생관이 없는 삶은 기쁨도 없으며 사랑 또한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날카로운 감성, 섬세한 정신,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종종 세상의 틀에서 이탈한다. 이탈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그런 삶을 꿈꾼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답답하게 여기고, 비예술적인 생활을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그러다 결국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에 삶을 저당 잡히지 않고 싸우거나 세상의 잣대에서 도피하는 삶을 선택한다.

작가 이인철. 어쩌면 그도 세상이 그려놓은 궤도에서 이탈한 삶을 선택한 사람이다. 예술에 대한 무한한 헌신과 공상을 사랑했기에, 세상에 붙들리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걸었다. 자신을 완전히 줘버릴 때만이 생명력을 얻게 되는 사랑. 이러한 사랑이 바로 그의 모든 예술의 원천이기도 하다.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고 있는 자신을 상상해보자.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수치스럽고 초조한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모두들 벗고 있는 상황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무척 편해지리라 믿는다. ‘볼 테면 보아라. 욕할 테면 욕해라’, 더 이상 감출 것도, 의식할 것도 없다.

이인철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모두 ‘누드’다. 작가가 모두 의도적으로 발가벗겼다. 마음을 내놓지 않고 곁눈질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먼저 원초적으로 다가서기 위해서다. 반대로 작가는 사람들도 무장해제를 하고 다가오길 바란다. 현대사회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소통의 부재’에서부터 해방되길 원해서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이 서로 교감을 얻기란 너무도 힘들다. 삶은 전원시나 감상적인 여행기를 읽는 것처럼 간단하지도 않고, 기쁜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예민하다. 모두 다 꽁꽁 숨기며 사는 세상이 답답한 모양이다.

“누드는 사람의 원형질(기본꼴)이다. 가공되지 않고, 치장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나는 작품을 통해서 은연중에 그런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목욕탕에서 만난 우리의 모습. 계급장 떼고 한판 붙어볼까. 뭐 그런 거다.”

작가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드러내는 주제는 ‘전쟁’이다. 평화를 얘기하면서 전쟁을 꺼내놓고, 전쟁을 얘기하면서 평화를 꺼내놓는다. 맨 처음 인류가 시작하면서부터 고삐를 늦추지 않고 서로 공격해왔다는 사실을 주지하면서, 그것이 인류의 발전에 나쁜 영향만을 준 것은 아니지만 매우 슬프고 유감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어서다.

“세계는 지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국이여. 전쟁을 그만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말발이 서는 지성인도 없다. 그래도 어디엔가 있을 텐데, 다들 경제논리고, 무한 경쟁이다. 전쟁, 언젠가는 멈출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정리하지 못한 모순들이 언젠가는 정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착륙이 아니라 경착륙이 될 것으로 본다. 그것이 나는 거대한 전쟁의 형태이거나 천재지변에 의한 재앙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내가 너무 비관적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여유마저 점령해버린 ‘전쟁’의 공포. 어찌 깊은 슬픔의 한숨을 거둘 수 있겠는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고 새파랗게 질린다.

이인철 작가가 ‘전쟁’에 대해 천작하는 이유는 환경적인 요인도 있다.

작가의 터전은 ‘문산’이다. 조금만 내달리면 임진각이고, 날씨만 안 좋아도 북녘이 보인다. 그래서 날마다 탱크와 군인을 만나고, 차갑고 휑하게 둘러쳐진 철조망과 마주친다. 그래서 그는 그런 곳에서 편안하게 살 수 없었고, 이러한 환경이 자신의 관심과도 맞아떨어져 작품의 모티브가 됐다.

“연평도 사건 이후 해병대 지원하는 젊은이가 배로 늘었다고 한다. 전부 다 총 들고 쳐들어가자는 얘긴가. 한반도는 아직도 휴전중이다. 전쟁 속에 있는 곳이다. 그런데도 그 많은 소재 중에서 전쟁을 다루는 작가가 없다는 게 신기하다. ‘전쟁 반대’, 누가 관심을 갖느냐. 전시를 해도 무관심이다. 보러 오는 사람이 적은 게 아니라 관심이 없다. 돈이 있든 없든 마음이 부자라서 그런지 향락에 치중하고 모든 것이 엔터테인먼트화 됐다.”

신경을 자극하고, 정력을 소모시키는 자본주의. 쾌락은 점점 많아지고, 기쁨은 점점 적어진다. 마비된 듯 흐릿한 눈빛과 일그러진 얼굴들.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있다면 심한 울렁거림을 경험했을 것이다. 병적인 불만족에 자극받으면서도 절망에 가까울 만큼 지쳐버린 쾌락. 이러한 세상에, 갤러리에 가서 고상한 그림을 관람하는 것이 어떤 위로를 줄 수 있을까.

가까이에서, 아니 미술이 좀 더 자기 성찰 속에서 민중과 일치할 수 있는 매력을 발산하고, 먼저 다가서야 능히 극복할 수 있다. 대중을 알고, 현상을 파악하고, 정성을 기울여야만 비로소 미술의 가치와 즐거움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다음 세대에 사회주의 혼을 담은 새로운 미술이 나온다면 자본주의 꽃인 팝을 기반으로 하는 어떤 형태일 것이다. 하지만 팝의 형식을 빌리면서 내용까지는 빌려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 미술에서 보석 같은 것을 끄집어내야 한다. ‘팝’ 아트는 대중과의 공감을 최고로 빨리했다. 맹점이라면 체제의 문제를 ‘개그’ 나 가벼운 터치 식으로만 건든다. 사실 이 정도의 팝 문화도 가지지 못한 이 나라이지만 어떤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 필요하다. 이명박이 마음에 안 들면 대중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할 수 있지 않느냐. 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사회를 생각하게 만든다면 ‘개그’ 그 조차도 의미 있다고 본다.”

‘팝’ 아트가 대중과 일치하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이 작가는 고무된 표정이다. 하지만 표현만은 무척 겸손하다. 아니 멋쩍은 듯이 마냥 웃어버린다.

“‘팝’이 쉬운 것 같아 보이지만 나는 나이가 들어서 어렵다. 남들이 하는 거 보면 쉬운 것 같은데 직접 하려면 쉽지 않다. 신선하고 촌철살인 같은 게 있어야 하는데 잘 안 된다.”

이인철 작가가 컴퓨터 작업을 한지 오래 됐다. 486DX가 최고 기종일 때였다. 그 당시 구입한 컴퓨터의 가격은 400만 원. 경차 프라이드가 450만 원일 때였다. 말로만 듣던 컴퓨터를 손에 쥐게 된 그는 각종 그래픽 프로그램을 배우기 시작했고, 8년 전부터 제대로 된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80년대 판화와 회화에 주력했던 그가 컴퓨터를 알게 되면서 180도 바뀐 새로운 표현방법을 연구하게 된 것이다.

“컴퓨터가 상업적으로는 발전했지만, 개인적으로 작업하는 사람이 없었을 때였다. 이 분야를 개척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새로운 작품을 내놓은 그에게 사람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작가들은 무척 ‘신선’해 했다. 모두들 그가 다음 작품으로 무엇을 내놓을지는 궁금해했다. 하지만 가까운 지인들은 말렸다. 굶어 죽기 딱 좋다는 충고였다. 예상대로 콜렉터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처음 사진예술이 등장했을 때와 비슷했다. ‘인화’라는 방식을 예술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처럼 ‘프린팅’이라는 제작 방법이 매우 쉽고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렸다.

“사지 않으면 그만이다. 섭섭한 건 없다. 기분이 더러워서 못하겠다. 풍경화, 장식성 그림만 원한다. 나는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따를 생각이 전혀 없다. 앞으로도 컴퓨터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그런데 요즘 물리적으로 힘듦을 느낀다. 눈이 침침하다. 할 때까지 해볼 생각인데, 오래가기는 힘들겠구나 생각한다.”

이인철 작가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미대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동아리에 들어가 독학으로 미술을 배우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983년 대학을 졸업한 뒤 보따리를 싸서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고생스러운 나날이었다. 엄혹한 시기였던 만큼 민중미술을 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패기만만했다.

“1980년 3월, 제대했다. 학교에 복학 하자마자 휴교령이 내려졌다. 전남 나주가 고향이었던 한 친구가 광주에 시체가 널렸다고 얘기를 해줬다. 당시 나는 단순하게 ‘데모하다 몇 명 죽었구나’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에 올라와서 달라졌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맛이 갔다. 소름이 끼쳤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의 방향을 틀었다. 노숙자처럼 돈은 없지만 만날 데모하고, 한 달에 20일은 길에서 보낸 것 같다. 80년대는 재수 없이 걸리면 끌려가는 시기였다. 긴장감이 있었다. 그래도 잡혀가면 할 수 없지 생각하면서 계속했다. 열정이 있었다. 주위에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했다.”

이후 그는 89년쯤 작가 7~8명과 함께 노동자문화운동연합에 들어갔다. 하지만 소련이 무너지면서 조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깨자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그 는 그 과정을 지켜봤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그때 그 마음 그대로 지금까지 한 눈 팔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사회주의가 되려면 모든 여건이 다 마련돼 있다고 본다. 옛날에는 먹을거리가 부족해서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했지만 지금의 풍요로움을 유지한다면 가능하다. 전 세계가 세금혁명을 했으면 좋겠다. 우스갯소리지만 FTA가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가 세금을 똑같이 내서 부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빌 게이츠의 재산이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재산을 모아놓은 것과 비슷하다더라.”

현대 사회는 삶의 대가를 사랑과 신용보다는 위선과 물질로 지불하려 한다. 진실한 삶이란 오직 사랑과 진심을 통해서 의의를 지니고, 더욱더 커다란 의미를 찾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의지가 있을수록 삶은 더욱 깊어지지만 이를 행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이인철 작가는 다르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대단한 스포트라이트 한 번 받아본 적 없지만 꿋꿋이 인내하며 세상이 변하는데 일조하기를 원한다.

“도래할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감은 안 잡히지만, 좌우지간 지금 이 세상 이 모습은 정말 아니다. 그냥 열 받는다. 뭐,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겠고. 앵그리 영맨이나 야수파, 표현주의 등을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니면 뭐, 세상 한복판에서 전위로 좌충우돌 작업하는 것도 미래를 여는 훌륭한 방법은 아닐까?”